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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연각(凌煙閣)에 걸린 뜻은
    카테고리 없음 2019. 2. 21. 20:17

    나는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김춘수 시인이 물망초에서「부르면 대답할 듯하고.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한」라고 말한 것은 이 사람들을 상정(想定)한 것일 게다. 이 사람들은 뇌성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번제(燔祭)였고 통과의례였다. 지금도 그들이 준마를 타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쁘게 치달리는 모습이 연상되고, 그들이 눈물 흘릴 때 어느새 나의 망막도 젖게 되고, 그들이 탄식하면 이윽고 나도 따라 탄식한다.

     

    그들은 내게 꿈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인생의 의미를 터득했다. 악의(樂毅), 곽광(霍光), 소무(蘇武), 등우(鄧禹).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이 그 사람들이다. 악의는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이 황금대(黃金臺)를 짓고 천금으로써 현사들 초빙하자 이에 응하여 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곽광은 한실(漢室)을 공고히 했으며 소무는 흉노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황제 선제가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기린각(麒麟閣)에 걸게 한다.

     

    등우는 그가 없었다면 광무제 후한의 성립이 어려웠을 정도였으므로 명제(明帝) 유장은 등우를 필두로 28명의 장수 초상화를 그려 구름 위에 솟은 운대(雲臺)에 걸게 했다.「계책의 방현령. 결단의 두여회」에서의 방두와 이세민이「나의 거울」이라고 한 위징은 또 어떠한가? 당태종 이세민은 이들을 포함한 24명의 공신들 초상화를 그려 능연각에 걸게 했다. 이들은 옛사람들의 생활방식인 시절이 수상하면 은거하지만 때를 만나면 웅지를 펴는 것을 보람으로 알았다.

     

    사람이 충성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있거나 시대에 부응하는 것은 행운에 속한다. 비록 군주와 신하의 관계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의 배역이고, 의기투합하고 상호조응하는 것은 천시(天時)와 인화(人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므로 갸륵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영장군이다. 최영은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여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란을 가는 와중에서 개경을 탈환하여 도형벽상(圖形壁上)의 인물이 되었다. 도형벽상 역시 공신의 초상화를 대궐에 걸어놓는 것이었다.

     

    이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그들의 기예가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주들이 마상(馬相)을 잘 본 백락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무를 깎는 데는 목수의 대패보다 못한 명검이나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보다 못한 천리마 신세였을 것이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음은 미천왕에게 을파소, 세종에게 성삼문, 정조에게 채제공과 서자들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일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작금의「고소영」인사는 현대의 서얼금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많은 대통령, 장·차관, 국회의원, 대법관 기타의 장들이 있었지만 과연 능연각에 초상화를 걸 정도의 인물이 있다고 볼 것인가? 최영처럼 도형벽상 할 만한 사람은 있는가? 지금의 산천은 연나라와 한나라, 당나라와 고려 때와 변한 것은 없다. 하늘도 그 하늘이고 바람도 그 바람이다. 그리고 천년이 흐르고.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세상의 인심이다. 사람들의 중심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사람들의 눈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2012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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