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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존경을 받아야 하나.카테고리 없음 2019. 4. 13. 09:05
우리는 때로 지인들과 「존경할만한 사람」을 화제로 삼다기 의견의 차이로 다투거나, 이번 금감원 일에서도 보듯이 업무가 꼼꼼하고 평소 신사타입인데도 갑자기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보고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존경해야하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라의 복이고 사회의 보배임은 분명하다.
존경이란 귀감(龜鑑)이 되고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에 대한 예우이자 대접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존경에 대한 함정이 있고 오해가 있는 것이다. 우리네 보통 시정사람들은 업적이나 치적아 대단하고 성과가 커야 존경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존경의 염(念)이나 존경의 도(度)는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것에서 오기 보다는 내면의 성숙과 높은 도덕성에서 옴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른바 생물학적 투쟁과 병행하여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역사적 투쟁도 해야 하는 우리들은, 존경도 생물학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미증유(未曾有)라거나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거나 파천황(破天荒)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광경도 보게 된다. 인간 지식의 지평을 확대시킨 사람도 있고, 인간생활을 양적으로 질적으로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사람도 있으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한 사람도 있다.
뜯어보면 모두 영웅적이고 극적이다. 영웅적으로는 세계판도를 바꾸고 역사를 바꾼 알렉산더대왕이나 징기스칸, 나풀레옹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마르코 폴로, 마젤란,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리빙스턴, 아문젠, 피어리 등의 탐험가는 꿈의 이름들이다.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 선천적 장애인인 제 20대 캐나다 총리 쟝 크레티앙, 「시간의 역사」의 저자인 스티브 호킹 박사 그리고 헬렌 켈러여사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묻고, 암흑시대 타파의 횃불을 든 마틴 루터, 발상의 전환 코페르니쿠스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제공자인 존 로크나 루소에 이르러서는 역사를 읽는 박진감이 있다.
반봉건과 반압제, 반착취과 반외세를 외치며 혁명을 감행했던 농민수령 이자성(李自成)과 홍수전, 열혈아인 트르츠키와 주덕으로부터는 사람이 어떤 때에 분노하게 되는가를 배운다.
국가적 위기에서 평민보다 먼저 몸을 던지는 영국의 상류층 사람들 앞에서는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신에 연원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기들의 사명은 많은 돈을 벌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쓰는 것이라는 빌 게이츠(B Gates)나 조지 소로스(G Soros)로부터는 부의 사회 환원이 즐거움임을 배우게 된다.
영원한 것을 갈망했던 스데반이나 이차돈, 혜초나 원효에 이르러서는 똑같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고, 황진이의 사후 주검을 짐승들에게 먹이라는 유언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저다지도 의연할 수 있는가하는 경외감이 들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제를 올리는 임호에 이르러서는 장부의 호기(豪氣)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적이고 극적인 일을 했다고 해서 꼭「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역사에 빛나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해서 반드시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위에 나열한 것과 앞에서 서술한 것만 가지는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인간은 성품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세상의 평가이다. 사람은 먼저 내면의 평가를 얻어야 하니 정직과 겸손, 인자함이나 온유함 등이다. 세상의 그 어떤 업적이나 치적도 이것들이 바탕을 두거나 이것들이 배어나오지 않으면 그저 경악할 일이지 크게 경탄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명사는 많으면서도 왜 존경하고픈 사람은 없고, 인물은 많은데 존경받을 사람이 적은 이유를 알 것이다. 이것으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명멸해간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 것이고, 그 존경을 획득한 사람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월의 역할일 것이다.
2007년 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