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이란 무엇인가?카테고리 없음 2021. 2. 1. 21:46
옛사람들은 생(生)과 사(死)는 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生死一如).
어느 선승(禪僧)은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그라지는 것(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다.
일찍이 조식은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지만 떠남은 마치 아침이슬 말라버리는 것 같구나. 人生處一世 去若朝露晞」라고 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유한성(有限性)의 다른 이름이 곧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것이라 공도(公道)이기도 하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따라 인생의 성패, 인생의 우열이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사생관(死生觀)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조식은 그의 시 백마편(白馬篇) 끝 구절에서 「죽음은 집에 돌아가는 것 인양 쉽게 생각한다. 視死忽女歸」라고 하여 집에 가는 것, 나그네가 그리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기쁜 일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삼국지에 관우가 장료와 싸울 때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말하는 꼴이 나를 달래려는 수작이구나. 내 어찌하여 궁지에 몰렸지만 죽는 일을 고향에 돌아가는 일처럼 생각 하니 아예 나를 설득하지 말고 썩 물러가라.」고, 여기서도 관우는 죽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쯤으로 치부했다. 역시 나그네가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키케로는 「인간의 죽음은 편린으로서의 로고스가 전체로서의 로고스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성(理性)이 자아낼 수 있는 죽음의 최고양태를 그려보였다. 중국 동진시기에 노장사상의 한 저작으로 짐작되는 열자(列子)에서는 「죽음이란 참(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여 죽음에 순응하고 거거에서 평안을 얻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이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의 희곡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그래도 태어났다면 차선책으로는 온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여 인생은 고해(苦海), 세상은 험한 바다임을 말한다. 소포클레스와 동시대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사물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단지 변화란 환각일 뿐」이라는 아낙사고라스의 견해를 좇아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왕희지는 난정집서(蘭亭集序)에서 「분명 삶과 죽음은 허망한 것. 팽조처럼 8백년을 장수하는 것이나 어린 소년이 요절하는 것이나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슬픔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탄생과 함께 불만족도 동시에 왔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됐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마치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불만족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만족의 상태로 돌아가려면 다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하여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김수영은 「인간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며 인간에게 죽음을 빼앗아가는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박탈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어느 평자는 「이러한 역설은 니체의 것이다.」라고 주를 달았다.
철인황제(哲人皇帝) 마르크스 아루렐레우스는 「죽음이란 감각적인 인상과 충동에 대한 조종과 마음의 방황과 육신에 대한 봉사로부터의 휴식이다.」라 말했고. 또 「 죽음은 출생과도 같은 것이고 자연의 신비로 출생이 여러 요소의 결합이라면 죽음은 그것들의 해체로 조금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가진 것이 현재뿐이라면 현재만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자연에 맞는 것으로 자연에 맞는 것은 나쁜 것이 없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장자는 그의 부인의 죽음을 두고 「자연으로 되돌아갔다.」라고 말한다. 바로 존재의 본질, 즉 도(道)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는 죽었으나 「그녀의 욕망, 인간의 판단, 세속의 속박」등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어찌 아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다. 역시. 정신이 높은 사람들은 통하는가 보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라. 朝聞道 夕死可矣」도 이 깨달음일 것이다.
사마천은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어려운 것이다. 非死者難也 處死者難也」라고 말해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한 것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맹자의 「죽음도 꺼리지만 더 꺼리는 것은 구차한 삶」이라는 정신과 상통하고. 「사람이 산 결과 죽음은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유가(儒家)의 자세라는 것이다. 어쩜 그렇게 스토아학파의 생사관과 닮았을까.
그러나 토마스 만의 「죽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이다.」라는 말도 경청해야 하고.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한 말 「죽음은 죽은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라 뒤에 남는 사람들에게만 불행이다;」에 이르러서는 물심양면의 의지처 부인 예니가 죽고 난 후의 칼 마르크스의 고독과 불행을 떠올리게 된다. 이 말을 한 에피쿠로스는 정직한 사람이다.
두이노의 비가(悲歌)에서 「인생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고 통찰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세상을 소풍 나왔다고 생각한 천상병이나 유배지로 안 이태백은 눈 밝은 사람들이었다.
죽음이 영원에로의 환승(換乘)이고 우주에로의 귀로(歸路)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평생 자유롭게 살았고 많은 남자들과 즐겁게 놀았다. 내가 죽으면 외로운 산골짜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라.」는 황진이의 말에서는 차오르는 슬픔이 무엇이고 죽음이란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만 말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2021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