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권력인가. 죄인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젊은 사람들의 성토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발언을 놓고 「노망이 났다.」「망령이 들었다.」고 연일 아우성이다. 이 바람에 나이 좀 먹었다 하면 「김동길 효과」의 유탄을 맞고 있다. 졸지에 대한민국의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본인과는 상관없이 노망이 들었거나 죄를 지었다. 어떤 경우든지 노교수의 명성에는 흠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김교수를 인신공격으로 몰아세우고 나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도매금 되어 퇴물로 취급하는 것은 아무리 그 뜻이 순수해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김동길 교수가 어떤 사람인가? 1980년 「서울의 봄」때, 권력욕 때문에 제휴를 못하는 양김씨를 호되게 몰아치면서 낚시질이나 가라고 레드카드를 내민 사람이다. 당시에는 군부 못지않게 양김씨도 권력이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목청을 높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 말을 했어야 하는 분위기인데 김교수가 나선 것뿐이다.. 대한민국이 청색이나 노란색 「단색공화국」이 아니라는 반가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원색적인 것들의 어지럼에서 인간의 자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다.
쟁쟁한 전과(戰果)와 무용(武勇)을 가진「 천하의 김동길」의 모습에서 세월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내일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준마(駿馬)도 쇠약하면 마구간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생각은 거북등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정의보다 상위의 가치를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해당되는 것도 아님도 알았거니와 시대 진운에 눈을 감는 데서는 지성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다시 보았다. 나는 김교수의 최근 발언들에서 평생을 정절녀로 살았으나 마지막 한 번 실덕한 여인으로서의 「인간 김동길」의 쇠락을 봤고, 「헝그리세대」「낭만주의 세대」의 종언을 또 보고 있다.
,먼 옛날, 활자혁명이 일어나기 전, 더 올라가면 문자시대가 열리기 전에는 노인들은 지혜의 보고 지식의 산실이었다. 그때에는 고려장을 한 노인을 모셔와 국난을 피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노인들은 권력 그 자체였다. 지금 우리가 쓰는 노마지지(老馬之智)란 말이 있는 것처럼 그때에는 늙은 말조차 경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인쇄술과 통신술이 노인들의 권위를 빼앗고 권좌를 대신 꿰차고 있다. 이제 노인들은 끈 떨어진 연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강상론이라는 충효도 힘을 잃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지금의 아이들은 더 이상 옛날의 효자 증삼이나 효녀 심청도 아닌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고 깨어있다면, 인구 분포상으로나 당위성면에서 이 사회는 그들에게 보다 더 많은 의자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논쟁이 생기고 이의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올드세대의 부덕과 불찰의 소치이지 뉴세대의 탓은 아닌 것이다. 앞으로 살날이 많은 그들의 입지를 넓혀주고 상상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올드세대의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도 아니고, 그들을 나의 틑로 키워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올드세대는 지금의 상황과 상태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인연과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옛날 우리 조상들의 기우는 오늘에도 역시 기우이고, 치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올드세대는 어떤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라는 것이 영광이고 훈장이며 자랑이라는 것이다. 마치 주목이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의 풍상을 아는 것처럼 세상에는 꼭 연륜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똑같은 책도 젊었을 적 읽었을 때와 나이 들어 읽을 때의 이해와 감동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장자도 「아름다운 것은 오래 되어야 이루어진다(美成在久).」고 했던가. 비록 노쇠했지만 여유가 있고 기품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는 권력은 아니더라도 권위쯤은 인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까?
2009년 유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