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붉은 별
-이글은 오래전에 아주 가까운 사람의 리포트로 쓴 것입니다. 침묵모드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표시도 될 겁니다.
目 次
Ⅰ.槪要
Ⅱ.序論
❶紅軍의 참모습
❷공산주의자의들의 열전
①모택동(毛澤東)
②서특립(徐特立)
③팽덕회(彭德懷)
④서해동(徐海東)
⑤주덕 (朱德 )
Ⅲ. 本論
❶대장정은 대서사시이다.
❷인민의 마음을 얻어라.
❸항일전쟁은 애국이다.
❹중국공산당 영원할 것인가?
Ⅳ.결론
❶중국홍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Ⅰ.槪要
「중국이 긴축정책을 쓴다거나 금리를 올릴 것이다.」라는 뉴스에 경제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주식시장이 요동치는 한국, 어느새 중국과 지리적 인접성〮〮· 역사적 긴밀성· 문화적 공유성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적으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친 중국정책이나 반미여론을 감안하면 조만간 미국 일본을 제치고 한국 최대의 교육 상대국이자 정치적 파트너로 부상할 것이다. 중국과 가깝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거대한 시장을 향한 기회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대국을 상대해야 하는 약소국의 비애를 반복 할 수 있다. 아직도 중화사상이라 일컫는 대국주의에 빠져있는 중국인과 오늘날 세계경제의 성장엔진이라 불리는 중국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나라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열강들에 뒤처지지 않는 길인 동시에 민족의 자존을 높이는 길일 수도 있다.
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했듯이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일당 독재의 공산당을 생성부터 알아보고,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등 중국을 움직인 사람들의 행적을 살피는 것도 중국을 이해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이념을 떠나 고난 속에서도 인민의 지지를 받고 대장정에서부터 마오이즘에 의한 문화대혁명 , 그리고 덩샤오핑의 흰 고양이 검은 고향이론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에 이르기까지 근세 중국의 100년을 아는 것은 세계사 전체를 아는 것과 비견 될 정도로 인간의 고뇌와 좌절, 희망이 이 속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잘 정제되고 압축된 것이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라 생각되며, 우리가 중국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두 나라의 선린은 물론 중국을 방편으로 삼으면서 더 나아가 중국을 극복하는 지혜도 도출되리라 생각한다. 의욕은 호랑이를 그리려하나 고양이를 그릴 수도 있지만, 처음의 의도한 뜻처럼 중국에 대한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Ⅱ. 序論
❶紅軍의 참모습
에드가 스노우는 미지의 세계이고 갖가지 의심의 대상인 중국 소비에트- 도저히 군사장비나 보급품 등 國民黨 軍에 당할 수 없는 홍군, 잔악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공산군을 알기 위해 홍군 지역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한다.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싸우는가를 알기 위한 취재는 목숨을 걸어야했다.
西安의 북쪽 끝은 중국인 여행자들에게는 한 민족이 펼쳐낸 풍부하고 다채로운 드라마의 추억을 새롭게 되살려주는 곳이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시킨 진시황이 약 2200년 전쯤에 태어나는 등 공산주의 운동이 하나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장소로써 이곳을 선택했다는 것은 부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중국 남부에서 여러 달 동안 홍군과 전투를 벌인 장학량 군대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식한다.
그들과 대적하고 있는 홍군은 유능하고 애국적이며 항일정신이 높은 지휘관들이 통솔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군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말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주와 국민당의 종노릇을 하는 白區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런 홍군을 그 누가 싫어할 수 있겠어요?』라고.
홍군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 이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족적』성격이 짙었다. 이들은 출신 省이 다르고 쓰는 방언도 달랐다는 점에서 비극의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그런 상처에 기가 꺾이지도 않았고 이들은 행복한 듯 했고 의식의 눈뜸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중국 프롤레타리아들로서는 최초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규율하는 것은 거의 완전한 자발적 의지 같았다고 기자는 말한다.
총이나 식량, 의복, 노새, 낙타, 양까지도 최상품은 홍군 전사들에게 보내고 홍군 지도자 하룡의 포로가 되었던 보스 하르트 목사조차도 『농민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실체를 안다면 아무도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❷공산주의자의들의 열전
공산당원들은 사적인 문제나 개인 차원에서의 동지들의 공적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려는 것은 겸손이나 불안 또는 많은 사람들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 개개인의 자세한 역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홍군의 주요한 지도자들의 양력을 소개한다.
①모택동(毛澤東)
모택동은 중국에서 벌어진 투쟁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지침구실을 한다. 그의 진정한 영향력은 당, 정부, 군의 정책에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정치국의 지배를 통해 발휘되었다.
그는 모든 중국 고전에 깊은 소양이 있는 學究者이자 닥치는 대로 광범하게 책을 읽는 濫讀家이며, 철학과 역사를 깊이 파고드는 학도이자 뛰어난 연설가이며, 기억력과 집중력이 비상한 사람이자 유능한 문필가이고 탈월한 군사, 정치 전략가 이다. 長沙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인해 나중 많은 사람들이 참수를 당했을 때 이 사람들이 내 가족과 마찬가지로 평민들이라 생각하고 이들에 대한 불법적인 조치에 격분을 느꼈다 한다.
모택동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회 개혁자였고 1920년 여름부터 이론 면과 어느 정도 실천면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또 이때부터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 생각했다.
②서특립(徐特立)
나이 50세에 놀랍게도 가정과 네 자식 그리고 장사 사범학교의 교장 직을 버리고 자신의 남은 운명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서는 존경받는 교수였다. 그는 위험인물로 지목 받아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중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었으나 입당을 권유하는 사람이 없자 『내 나이 50, 나를 공산주의자들은 늙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 하였다. 이 때 공산주의자 한 사람이 입당을 권유했을 때 그는 아직도 자신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 하는데 쓸모가 남아 있는 존재임을 생각하니 희열의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말했다.
③팽덕회(彭德懷)
팽덕회는 소년시절에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읽고 처음으로 군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남방 홍군의 대장정에서 선봉대인 1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적이 수만 병력을 동원하여 쳐 놓은 여러 개의 저지선을 돌파했으며 진군중의 중요한 거점들을 점령하였으며 주력 부대에게 통신망을 확보해 주었고 마침내는 섬서성에 이르는 길을 뚫고 서북 소비에트의 근거지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지쳐있거나 부상당한 동지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말을 내어주고 장정 6000마일을 대부분 걸어갔다.
④서해동(徐海東)
이 사람은 행동, 외모, 대화, 출신 배경 등에서 다른 어떤 홍군 지도자보다 더 투철한 계급의식을 지녔다. 그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임에 자부심을 느꼈고, 웃으면서 자신을 꾸리(苦力)라고 지칭했다. 서해동은 병사, 기병, 또는 혁명가로서도 자기부대에 자부심을 가졌고 자기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⑤주덕 (朱德 )
주덕은 남들 눈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 즉 부와 권력, 사랑, 지식, 아편의 꿈, 우뚝한 명예, 그리고 유교의 미덕을 전파할 여유가 보장되는 장래 등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독서로 인해 이러한 것들로부터 몰락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인민의 희생에 가슴 아파했고 중국의 근대화를 생각했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국민당 진영에 가담했었듯이 그 동정심 때문에 공상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다. 군의 통수를 맡는 그는 일반사병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모든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중국에 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주덕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이 중국 역사에서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Ⅲ. 本論
❶대장정은 대서사이다.
장개석의 5차이자 마지막 초공전에서 홍군은 두 가지 중대한 과오를 범한다. 하나는 1933년 福建省 반란 중에 채정개 군과 연합하지 못한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동전술을 포기하고 단순히 방어에만 전연한 그릇된 전략의 채택이었다. 엄청나게 우세한 南京軍을 진지전으로 대적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거기에다 장개석군의 새로운 전술, 전략이 國民黨軍의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우세와 연결되어 홍군은 1934년 급속히 악화되는 강서에서의 존립여건을 타개할 방도를 찾아야 했으며, 국내 정치 상황도 주 활동무대를 서북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홍군이 승리에 찬 장정 끝에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감숙과 섬서성에 의기양양하게 도착 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는 공산당의 올바른 지도역량과 두 번째는 소비에트 인민의 기간요원들이 발휘한 굉장한 노련함과 용기, 결의 그리고 거의 초인적인 인내력과 혁명적인 열정에 기인된 것이다. 최초의 보루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이후 홍군은 1년여에 걸쳐 서방과 북방으로의 획기적인 대이동을 시작한다. 실로 다채롭고 화제 거리도 많았던 원정이지만 모험, 탐사, 발견, 인간의 용기와 연약함, 환희와 승리, 고통, 희생, 충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점철하는 수 만 명 젊은이들의 꺼질 줄 모르는 열정과 결코 좌절하지 않는 희망 그리고 경이롭기 만한 혁명적 낙관주의 이것들 모두 아니 그 이상의 것들이 근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웅장한 이 장정의 대서사시 속에서 구현 되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이건 자연이건 신이건 죽음이건 그 어떤 것에 의해 강요 되는 패배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2만 5천리의 장정]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복건성의 가장 먼 지점에서부터 섬서성 북서 끝의 종착 지점까지 가는 동안에 있었던 우여곡절과 우회 그리고 역의 행군을 감안할 때 행군대 일부는 그 만큼 먼 거리를 아니면 더 먼 거리를 갔을 것임이 틀림없다.
대도하(大渡河)의 횡단은 長征 중에 있었던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만약 홍군이 그곳에서 실패했더라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홍군에게는 군대 생활이 단순한 생계유지의 수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젊은이 들이었다.
홍군은 열여덟 개의 산맥을 넘었으며 스물 네 개의 강을 건넜다. 특히 그 열여덟 개의 산맥 중에서 다섯 개는 만년설로 덮여있는 산맥이었다. 그들의 통과한 성 12개, 점령한 도시와 마을이 예순 두개, 돌파한 지방 군벌의 포위망이 무려 열 개였다. 그밖에도 그들을 토벌할 목적에서 파견된 중앙 정부군의 각종 병력을 물리치거나 피하거나 따돌렸다.
수 십 년 동안 어 떤 한 민족의 군대도 통과한 적이 없었던 지역을 통과했다. 홍군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표방한 것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들의 장정이 군사상 괄목할 만한 대위업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서북방을 향하는 홍군의 행동은 몇 개 지역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강요당한 전략적 후퇴임에 틀림없지만 마침내 홍군은 핵심세력을 보전한 가운데 목적지에 도착했고, 이때 홍군의 사기와 정치적 의지는 예전과 다름없이 굳건했다.
❷인민의 마음을 얻어라.
어느 시기에는 국민당 군이 홍군보다 수적으로 대략 10배나 20배까지 우세했을 뿐만 아니라 장비도 우세했고 경제적 자원 면에서도 홍군보다 몇 배는 앞서있었고 외국으로부터는 물W;F적 원조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홍군이 백군과 싸우면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또 오늘날까지 견디어 내면서 오히려 군사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홍군과 소비에트 정부가 그들 지역내에 있는 인민을 바위 덩어리처럼 단단하게 결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기구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정부를 위해 억압자들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고 그들 자신의 이익과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 자발적이고 자각적인 입장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운동의 모든 역사는 특정한 사상의 절대적 정당성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생존권을 널리 전하고 지키려는 장대한 선전활동의 여정과 방어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때때로 범한 잘못이 크더라도 이들의 지나친 행위가 몰고 온 결과가 아무리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또 이들이 강조하고 역설한 내용이 아무리 과장 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진실로 통감하는 선전 목표는 중국농촌의 수백만 인민들을 흔들어 깨워서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시키고, 이들에게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에 대한 신념을 일깨우며, 도교와 유교의 정적인 믿음과 이에서 연유된 소신함과 수동성을 떨쳐버리도록 싸우게 하고, 또 교육과 설득 때로는 분명 괴롭힘과 강제를 통해 중국의 농촌에서는 새로운 생각인 [인민의 통치]를 위해 투쟁하게 하며, 아울러 정의와 평등, 자유, 인간의 존엄성이 구현되는 삶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을 받는 수 천 명의 청년들이 갑자기 접하게 된 과학적 지식의 세계를 통해 그들 스스로 웅대한 꿈을 쫒아 일어서는 [인민에게로 눈을 돌려] 그들이 배운 새로운 지식의 일부를 지적 불모지인 농촌에서 암울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조국의 뿌리 깊은 기반인 농촌으로 파고들어 보다 풍성한 삶을 이룩하는데 협력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북의 대기근이 거대한 4개성에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지도 어언 3년이 되어갈 무렵인 1929년, 그 몇 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기근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가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마을들 대부분에서 아직도 부자와 미곡 매점, 상인과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도시에는 관리들이 기녀들과 어우러져 노래하고 희롱하는 가운데 식량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과연 중국 농민들은 비겁자인거? 왜 항거하지 않는가? 중국 농민들은 방법과 조직과 지도력과 실천 가능한 강령과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가 주어지면 싸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공산주의자들이 서북방에서 인기가 높았던 것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곳의 상황은 분명히 혁명을 기다리며 무르익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분명히 사람들이 반대하며 투쟁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아니 투쟁하여 성취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타도해야 하는 상황이 엄존하고 있었다. 붉은 빛이 서북방에 나타났을 때 수만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것을 희망과 자유의 상징으로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어떤 시대 어떤 곳의 혁명군이라도 결코 방종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청교도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은 홍군에게도 해당된다. 홍군의 혁명 의식은 백군이 따라올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 집회에서 이들 젊은이들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싸우다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그 신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념이 얼마나 확고하게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제5차 초공전이 시작되면서 백군은 홍구 경계 내외의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거나 이주 시켰다. 홍군의 군대는 파괴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인간기지인 농촌은 파괴되었고, 언덕과 골짜기에는 젊은이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살아남은 삶들의 가슴은 갈갈이 찢겨 있었고 워낙 비참했던 광경들이 많아 자신들이 목격했던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같은 경험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계급적 증오감을 남겨 놓았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❸항일전쟁은 애국이다.
1936년 9월 홍군은 국민당에게 대일 저항의 입장을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민당과의 화해를 추구하리고 결정한 마당 이였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점령에 의한 권력 장악을 의도하는 군대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정치 선전세력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어간다. 동북군은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6개성을 지나서 먼 길을 실려 온 용병집단에서 적군의 민족적인 항일 애국 슬로건에 영향을 받아 계속되는 내전의 무익성을 확신하고 또 오로지 한 가지 권고와 한 가지 일념[고향으로 되 쳐들어가서]그들을 가정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가족을 학대하며 살해하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만주를 되찾겠다는 희망에만 피를 끓이고 충정을 바치려는 군대로 변했다. 당시 이러한 생각은 남경정부가 견지하고 있던 대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동북군은 항일을 내세우는 홍군에 대해 점차 심정적으로 가까워지고 동료의식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좌파인 전국 구국 연합회가 주도하는 항일운동은 엄격한 탄압조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기세를 올렸고 또 대일 강경 자세를 취하라는 대중의 강한 압력도 간접적인 형태로 남경정부에 가해졌다. 많은 애국진영은 인민의 모든 역량을 결집시켜 공동의 적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내전종식과 자발적 통함에 기초한 통일전선 결성을 요구한 공산당의 제안을 남경정부가 받아 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안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공산당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공산당은 평화적인 해결과 장개석의 석방을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시 남경정부의 지도적 위치에 복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조국이 일본에게 정복당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할 것이다. 국가적 자유를 박탈당한 민족에게는 혁명적 임무가 조속한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투쟁이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실행할 나라를 빼앗긴다면 아예 공산주의를 논의 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라고.
서안사건 후에 중국 공산당이 당장 얻은 이익은 내전의 중지, 남경정부의 대내 정책에서 나타난 어느 정도의 자유화와 관용, 대일 강경 정책, 그리고 소비에트 지구가 오랜 봉쇄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난 것 등이었다.
내전종식의 평화 속에서 혁명과 항일전쟁 대열에 필요한 새로운 간부들을 자유롭게 지도, 훈련, 단련시킬 수 있었다. 10년간에 걸친 격렬한 내전 끝에 적과 백은 느닷없이 즐거웠던 옛 시절로 되돌아갔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는가? 그렇다 중국이 승리했고 일본이 패배한 것이다.
❹중국공산당 영원할 것인가?
이미 중국에서 수 만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상도 또 그 이면을 떠받치는 에너르기도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사회혁명 운동은 패배나 일시적인 후퇴를 맛보기도 하지만, 이 운동을 태동시킨 기본적인 여건들이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시간의 흐름은 항일 투쟁을 위한 민족단결의 성취가 혁명운동의 다른 어떤 직접적 목적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은 중국의 혁명가들이 쟁취하려고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해온 사상들의 타당성을 입증해 주었다.
일본에 대항하는 유격대는 청렴결백, 열정적인 애국심, 민주정치의 실현을 위한 헌신, 백성들에 대한 철저한 신뢰감, 그리고 백성들을 일깨워 맡은바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도록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의 예는 달리 유격대의 지도자들이 농민 대중을 상대로 하여 거둔 성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일본에 대한 공통의 증오감이야말로 이들 열성당원들이 인민의 애국심을 일깨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준 직접적 계기였지만 정치적 개혁과 경제, 정치적 변화도 이루어 졌다.
1928년 소수의 젊은이들이 정강산 외딴 산정에 적기를 꽂은 후 일종의 시위운동을 시작한 이래, 드디어 1944년 여름에 이르면 십자군 원정대가 조국을 뒤덮는 대대적인 운동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는 중국의 중제자라면 더 이상 거대한 인민 대중을 대변하는 이들의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Ⅳ.결론
❶중국홍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에드가 스노우가 목숨을 걸고 홍구에 들어가 홍군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그들이 목숨을 바쳐 이룩하려고 한 것은 공산주의라는 수단을 통한 인도주의이고, 인간해방 인간 존중임이 밝혀졌다. 공산주의가 절대선이고 만능의 KEY가 아니라 지방 군벌, 토호세력, 외세에 대항하고 갖가지 모순과 병폐를 해결하는 데에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가장 손쉬웠고 적용이 잘 되었고, 시대정신에 딱 맞은 것이다.
21세기 오늘날에 이때의 혁명 지도자들이 다시 활약한다면 공산주의 대신 아마 다른 주의를 투쟁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중국의 붉은 별]은 [고정된 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저 노자의 말과 같이 인간에게 이롭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의 추적이고 주목이라고 본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론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했다. 중국인만큼 현실주의적이고 이재에 밝은 국민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체제나 주의는 한때의 유행이고 처방일 뿐 종국은 현실에 충실함과 현실의 안락함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중국보다 유교도 더 명분적이며 형식적이고 사회주의 이론이나 좌파이론도 중국보다 더 고루하고 강경하고 완고하다.
우리도 저 중국인들의 대장정을 가능케 한 대륙적인 기상과 실용주의 실질주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이자 인적, 물적 교류가 가장 활발한 나라이다. 그러면서 미움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제 2의 일본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 경제적으로는 상호 보완을 통한 협력이 필요하고 정치, 군사적으로는 상호 평등, 불간섭이 요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 쪽의 고구려사 편입이나 국회의원들의 대만여행 자제 요구를 보게 되면 저들의 대국주의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실력을 인정하고 참 모습을 보되 빼어난 문화와 막강 정보기술로 놀라게 만들고 존경하게끔 만드는 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인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팽덕회, 주덕, 등소평 등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인물들을 다시금 조명하고 재해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처럼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눈이 하나인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이고 저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하여 헌신하고 목숨을 바친 영웅들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피레네 산맥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그릇된 세계관을 가졌고,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등식아래 편견을 가졌고 일방적인 이념에 치중했다. 지금까지 부끄러운 주입식 교육을 받았고, 균형있는 시각, 서구적이 아닌 제3세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역사를 읽어야 함을 배웠다. 위 사람들이야말로 군인으로서는 한니발이나 롬맬을 능가하고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함을 느낀다.
그들을 바로 보는 것이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홍군의 지휘관들은 사상자 발생의 빈도가 아주 높았는데 그들은 [진격하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앞에서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심 없고 희생적인 홍군의 지도자들을 떠올린다.
이런 훌륭한 지휘관들, 혁명지도자들이 이끄는 운동이 실패할 수가 없고 패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조직이 멸망하고 이런 단체가 격퇴당하는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흥하는 나라 잘되는 집안의 표상을 홍군의 지도자들은 보여준 것이다.
이런 지휘관들의 정신이 살아있고 근본을 이루고 있는 중국은 당당히 세계에 명함을 내 밀수 있고 저들의 세계와 인류에 대한 기여를 기대 해도 될 것이다.
※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에드가 스노우
역자: 신홍범 출판사 : 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