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글」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중국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의「글 쓰는 일이 천하의 제일가는 일이요, 만고에 길이 남을 유일한 것이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정신을 길어내고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글 쓰는 사람은 고고함을 즐기면서도 천하에 남을 「아름다운 문장」「빼어난 문장」을 짓기 위해 고심苦心하고 부심腐心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부터 시인문사詩人文士라는 말에는 풍류와 지성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에 걸맞게 천하의 절구絶句와 천고의 절창絶唱을 다투었다. 이백이 보고 시 짓기를 멈추었다는 최호의 「황학루黃鶴樓」나 묘청의 도당으로 몰려 죽은 정지상의 한국 별리시의 백미라는 「대동강大洞江」은 인간미의식의 지평을 넓혔고.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이밀의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울지 않으면 효자가 아님과 남명 조식의 문종왕후와 명종을 나무라는 상소와 병자호란 때 아내와 친구들과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잇따른 왕의 부름을 거절하는 윤선거의 상소문에서는 인간정신의 애절함과 엄숙함이 짙게 배어난다.
현대문의 가벼움과 공허함에 눈을 내리깔고 보는 입장에서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찬탄과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글들이야말로 생명력 있는 글들이라고 보지만. 그런 글에도 계절에 따라 꽃이 다르게 피지만 꽃의 여왕이 있는 것처럼 미세한 글의 우열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글은 어떤 글인가? 지금처럼 중국 원전原典 일본원전을 따지고. 지식의 나열이나 선배들의 성과물을 독창적인 것으로 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것은 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자세이다. 사람들은 언어에 절대성을 표시하나 사실 언어란 것은 생각의 아주 작은 부문이고 또 그 생각이란 것도 의식의 아주 작은 부문임을 생각한다면 언어란 것은 그리 믿을 것이 못됨을 알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가 언어의 제약을 벗어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지향한 것처럼 최고의 글은 언어의 한계성. 기쁨·분노·슬픔·즐거움 등을 극복한 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의 공자가 왜 새로 짓지 않고 새로 쓰지 않고 구태여 전달하고 편찬하고 기술할 뿐이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훗날 그의 제자 육상산이 풀이한 「우주는 사람을 한정짓지 않는데 사람이 우주를 한정짓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은 또 다른 제자 이탁오가 「공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공자를 죽여야 하는」우상화한 공자. 빼만 남은 공자 훗사람들의 학문에 방해가 되는 자신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무릇 아무리 시가 좋고 글이 좋아도 시픙詩風이나 문풍文風이라는 말이 있듯 모양이나 자세가 시나 글을 압도할 수도 있고. 치료를 하고 재주를 부리고 첨가함으로써 병이 더욱 악화되고 아니 함만 못하고 군더더기가 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래서 옛말에 「최상의 법도는 인위적 조치가 없고. 최상의 통치는 소리가 없으며. 최상의 교육은 말이 없다 至德無爲 至治無聲 至敎無言.」에서 나는 최상의 글은 형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를 집대성하고 널리 알린 주자나 조선의 송자라는 송시열은 그 인격의 고매함이나 학문의 광활함에도 불구하고 사상을 규정하고 일률한 일로 인하여 덜 아름다운 것이다. 그들은 다리를 놓고 길을 닦았으나 그것은 편도선이었고 원웨이였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울타리였고 또 다른 절벽이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아류나 부류을 만드는 사람은 비록 그것이 제자·사숙이라는 이름을 달지만 그의 글은 이제 최하의 글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극한 글. 죄고의 글은 「문자의 그림화」를 지향한다. 자구字句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경情景으로써 보여준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에서 보여주는 「제나라의 권력가 최저는 임금인 장공을 죽였다. 」라거나 원진의 죽은 아내를 그리는 시詩중에서 「평생을 (눈썹 한 번 펴지 못한) 당신에게 보답하리 報答平生未展眉.」는 그것일 것이다.
지금은 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대이다. 권력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도 바뀌는 시대이다. 글의 세계만 독야청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작가의 일방적이고 주입적이며 세뇌적인 글만 통용되었다면 앞으로의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독자의 창의력을 북돋아 독자가 제2의 작가로 참여하는 글이 대세가 되고 최고의 글이 될 것이다. 앞으로 기 승 전은 있으나 결, 마무리는 독자가 하는 글이 나올 것이며, 주인공의 이름이나 활동장소를 독자가 선택하는 글도 나올 것이다. 앞으로는 독자의 서평이 그 글을 완성시키기도 하고. 독자가 그 글의 제2 제3편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글은 마치 겨자씨가 썩어 밀알이 되는 것처럼 희생하여 또 다른 최고의 글을 낳는데 있으며, 누구든지 글쓴이가 뜻한 것과 다르게 규정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010년 2월 15일 설 이튼날
눈 쌓인 관악산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