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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치배분을 생각한다.

무릉사람 2019. 2. 20. 21:31

일찍이 어느 뉘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했고. 그 뒤의 뉘는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는 진리(정의)가 저쪽에서는 허위(불의)가 된다.」고 했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 두 가지가 경합하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용산참사에서부터 4대강 세종시 친일파 문제에 이르기까지 합종合從이나 연형連衡 등의 술수만 있어 지역이나 계급에 따라 악마가 천사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악마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다양성이나 개성의 차원이 아니라 중구난방이나 지리멸렬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효자보다 악처가 더 낫다.」 했던가.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유교가 국가이념이었던 조선시대가 비록 「언 발에 오줌 누기」일망정 불교나 유교는 튼튼한 울타리였으며 자양분으로서는 썩 좋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최상책이지만 우리 모두 전쟁을 회피하기로 한 이상 분명 공약수公約數가 있고 절충점이 있으며

 

분명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며, 누구는 깨끗하며 누구는 그렇지 않으며, 누구는 충성스러우며 누구는 간악할 터인데도 이 나라는 모든 것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의恣意나 임의任意대로 했다는 것이며, 사설私說 사론私論 사감私感을 정설 정론 공감으로 둔갑했다는 것이고. 원리나 원칙 등을 비웃었음을 의미한다. 또 이것은 앞으로 사람들이 말로는 공명公明하고 공정公正함을 운위하나

 

계속 유 불리에 따라 어느 것은 빼고 어느 것은 집어넣으며, 어느 것은 미화하고 어느 것은 격하하며, 어느 것은 확대하고 어느 것은 축소하며, 어느 것에는 눈을 감고 어느 것에는 귀를 열어둔 것임을 암시한다. 옛날 사람들은 조선에서 태어나나 중국에서 태어나든 기원전 사람이든 기원후 사람이든 장자莊子든 계관시인桂冠詩人이든 품성이 똑같았고 언행이 똑같았다. 같은 천리天理를 배우고 같은 현인賢人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닮지 않을 수 없고. 흡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다시 올바른 가치배분을 생각해야 할 때니 그것은 생존권이 제일 먼저이고. 다음이 정의이며. 그 다음으로 정의는 인애仁愛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각기 일장일단이 있으며, 주문공周文公의 부귀보다는 공자의 가난이 낫고. 신죽주의 호사보다는 성삼문의 충절이 가상하며. 고부군수 조병갑의 위세보다는 고부군민이 더 정의로우며, 일본군 경력의 박정희보다는 독립군 출신의 장준하가 더 우위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009년 1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