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
영혼이 맑은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부족한 표현이다. 그가 노년을 맞았다면 분명 그는「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기뻐했다,」고 했을 것이다. 일본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뜻밖에도 전장(戰場)에서 자주 인생의 짧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가 심복 미쓰히데에게 암살을 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더라면 분명 삶의 정치(情致)를 즐겼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서글픔을 갖고 있다. 분명 청춘은 아름답고 축복받은 것이다. 그러나 노년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청춘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축복일 수 있다. 그것은 청춘이 빠뜨리고 경험하지 못한 것에 발을 내딛는 것이며 인생의 난숙기(爛熟期))로 들어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욕(老慾)에 따른 노추(老醜)를 피하지 못하고, 늙어서도 세상의 온갖 잡다한 망령들에서 벗어나자 못한다. 모두 노인(老人), 노년(老年)을 쇠락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육체가 허약한 것은 키케로의 말대로 신체에서 오는 강렬한 욕구를 잠재울 수 있고, 물적으로 초연하여 그때까지 속박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색신(色身)이 공신(空身)이 될 수 있는 기회이며, 소동파가 그의 글씨를 가리켜「나의 글씨에는 법도(法道)가 없다,」에서 그 법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노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류의 문명에 기여한 많은 요절한 천재들이 자유인이 못된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노년에 비하면 그 앞의 시기들은 이 자유로움을 위한 산고(産苦)의 시기요 산통(産痛)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고, 우리 인생의 최고 목포는 자유로움인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고 그 일부분만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을 오롯이 깨달아 그 일부분마저 버리고 놓고 비움으로써 해방의 넘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결국 노년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 노년에는 톨스토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2012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