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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높은 여자

무릉사람 2019. 2. 23. 22:50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의 절반은 여자이지만, 여자라고 다 눈 높이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많이 배웠다고 꼭 눈높이가 높은 것도 아니고. 부잣집 출신이라고 반드시 눈높이가 높은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눈높이가 높은 여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눈이 높은 여자가 드물거나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이 높은 여자들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감동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이면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사람들은 100만원의 머리를 하고. 명품 핸드빽을 메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고급 외제차를 타는 여성. 권력자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사랑한 클레오파트라, 그리스 선박 왕 오나시스와 결혼한 마리아 칼라스와 재클린. 또는 중국 청나라의 서태후나 조선시대의 장록수 정난정 장희빈 김좌근의 첩실 나합. 민비. 근자에는 영국의 대처나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눈이 높은 여자라고 얼핏 생각하기 쉬우나 이들은 탐욕스러운 여자들이지 눈이 높은 여자는 아닌 것이다.

 

내가 눈이 높다고 말하는 여자는 거의 부정확하여 믿지 못하는 육안(肉眼)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면서 하늘 밖의 하늘을 볼 줄 아는 여자인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검사가 청혼을 하자 그의 의식이 경직되었을 거라며 거부한 한 규수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는데, 그 규수 같은 사람이 진정 눈이 높은 여자인 것이다. 옛날에는 눈이 높은 여자가 많이 있었다.

 

부랑아 심희수를 조선의 명재상으로 만든 일타홍. 중국 청나라 초기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후방역을 사랑하여 정조를 지키기 위해 넘어져 머리를 다쳐 흘러나온 피가 하얀 부채를 물들인 도화선의 주인공 이향군이 그 사람이요.

비록 살아서는 남편 김성립을 따르겠지만 죽어서는 시인 두목을 따르겠다는 허난설헌. 중국 한무제 때 미망인의 몸으로 가난한 서생 사마상여을 만나 야반도주하여 자유연애의 시조가 된 탁문군이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눈이 높은 여자의 최고 자리는 한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을 사랑하고.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100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 길상사의 옛 주인 자야 김영한일 것이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면 그 여인이 어찌 그 옛날에만 있고 오늘에는 없겠는가. 바로 당신의 아내. 수십 년간 동고동락하고 살아서는 서로 사랑하며 죽어서는 함께 묻히자는 당신의 아내가 오늘 바로 유일한 눈이 높은 여자일 수도 있다.


2015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