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의 지배를 받고 싶다.
「천명교체설」이든「왕권신수설」이든「사회계약설」이든, 헤겔의 국가주의에 의한「무질서의 부재」를 위해서든 루소의 자연법사상에 바탕 한「구속의 부재」를 위해서든, 인간은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다스리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판결내리는 사람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또 군주제국가에 태어날 수도 있고 공화제국가에 태어날 수도 있으며, 독재국가에 살 수도 있고 ,민주국가에 살 수도 있으며, 좋은 대통령·좋은 재판관을 만날 수도 있고, 나쁜 대통령·나쁜 재판관을 만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우리의 의사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야말로「복불복」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영국의 웰링턴장군을 떠올린다. 그는 워털루전투를 마치고 사람들이 승리의 소감을 묻자 기뻐하는 대신 전사자를 위해 울면서「나는 이 전투가 내 생애의 마지막이기를 하느님에게 빈다.」라고 하여 휴머니스트로서의 고뇌를 드러냈으며 재차「항상 싸운다는 것은 괴롭고 싫은 일이다.」라고 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인품을 보여주었다.
나는 웰링턴장군의 그 말에서 그가 열 손가락 깨물어 어느 손가락 하나 아프지 않을 만큼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가 초나라 궁궐에서 쏜 화살은 필경 초나라 사람이 줍는다는 관용심을 가진 사람임을 대뜸 알 수 있으며, 또 그가 하나의 가치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치를 알고 있고, 획일적인 것 대신 다양한 것을 지향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어떻게 전쟁판에서도 온화한 말투와 예의를 잃지 않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교양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구나 추상같은 호령과 엄중한 단죄, 가차 없는 비례의 응징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번민하고 고뇌하는 빛이 눈에서 보이고, 변하는 것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머리에 이해시키는 대신 가슴에 남는 연설이나 판결을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이나 헌법재판관이 단순히 대통령이나 재판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인의 감성과 철학자의 정신과 역사가의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늘의 대통령이나 헌법재판관은 시인과 철학자와 역사가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의 말에 눈알을 부라리는 측근들에게 한 말「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이나 부르투스가 시저를 찌르고서 한 말「나는 시저를 사랑하지만 로마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나 유마힐거사가「중생이 슬프면 내가 슬프고, 중생이 기쁘면 나도 기쁘다.」는 말을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헌법재판관도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복인 것이다.
어찌 이런 사람을 세상이 깔볼 수 있을까?
어찌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고 또 무엇을 찬양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이름은 백세(百世)에 전하고. 청사(靑史)에 남는다는 것을 이런 경우가 아니던가?
아. 세상에 미인(美人)이 드물고 절경(絶景)이 드문 것처럼 훌륭한 대통령, 훌륭한 재판관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어찌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야만 감우(感遇)이고.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감우(感遇)이겠는가. 좋은 대통령. 좋은 재판관을 만나는 것도 감우(感遇)인 것이다.
그런데 나쁜 대통령이나 나쁜 재판관을 만나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하나. 세상을 허랑과 방탕하게 살다가 깨달아 우리에게「일명경인(一鳴驚人)」이라는 말을 남긴 초장왕 같은 사람은 드문 법. 그때 우리는 옛날 저 이스라엘의 시인이 한 말「이 역시 지나가리라.」를 되 뇌이고 윤동주처럼 겨울이 지나 봄이 와서 무덤에 파란 풀이 돋아나길 바라는 것이다.
2014.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