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영화에 찌든「대한민국」
영화「국제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더니만 끝내는 정치적인 해석까지 나온다. 왜 단순한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할까? 그것은 우리사회가 온갖 갈등을 겪고 있으며 모순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작진들은 이 영화를 영화 자체로서 보아달라고 하지만 이미 그 경계는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제작진이 정치적인 파장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순진하거나 단세포적인 것이고. 그것을 생각했다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돈이나 벌자는「비단장수 왕서방」적 생각일 것이다. 또 이 영화를 정치적인 색깔을 입히는 사람들은 하늘의 공(功), 많은 사람의 공(功)을 특정한 몇 사람 또는 한 사람이 차지하게 만드는 도적이라 할 것이다.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국민.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국민들에게 이 영화가 재빠르게 먹혀드는 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정 많고 눈물 많으며 공동체 지향적이며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것에 애착을 갖고 있는「향수병(鄕愁病) 민족」의 DNA 이용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몇 십년동안 지속적으로 강조된 산업화가 한계에 부딪히고 거기에 좌절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통증을 마비시키는 모르핀으로 작용하다는 사실이고, 회고적이라는 데서 우리나라가 이제는 전성기를 지나 쇠락기에 접어들었는데 도처에서 피로현상이 빈발하는 퇴폐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어려움이 있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직「덕수」의 시대만 어렵고 힘든 시대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엎드려 절 받자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고. 덕수의 자식과 손자들이 사는 오늘이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 수도 있다. 총성 없는 전쟁이 더 살벌하고. 풍년 속의 거지가 더 서러운 법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아직도「이수일과 심순애와 김중배」가 나오는 신파(新派)시대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사해동포주의나 세계시민 같은 담론을 상상케 하는 대신 고슴도치 제 새끼 사랑하는 것만을 보여주고, 그림자일 수밖에 없는 자기도취에 빠지게 하며, 소성(小成)에 만족하게 한다.
원작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영화감독의 예술적 감각과 역사인식이 돋보이는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위대한 개츠비」나 장이에모 감독의「인생」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식상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대한뉴스」를 보는 느낌. 바꿔 말하면 아녀자의 헤픈 눈물은 볼 수 있으나 장부의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볼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단순히 연대기적인 기록 일뿐이고. 사람들이 꼭 보고 싶은 것은 빠뜨린 채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뿐이다. 아직도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곡「오이디푸스 왕」이나「안티고네」또는 중국 청나라초기 공상임의 희곡「도화선(桃花扇)」같은 것으로 어찌 우리의 머리를 강타하고 가슴을 휘저어놓지 못하는가?
반성이 없고. 균형을 잃었으며,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사상과 철학이 없으니 당연히 함의(含意)나 함축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는 말아야 되는 것 아닌가. 그래, 오늘의 심각한 갖가지 양극화를 있게 한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 시대에 감사하고 찍소리 하지 말고「가만있으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들만이 힘들게 살았고 어려운 세월을 살았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들만이 험한 세월을 산 것은 아니다. 나와 나의 친구들도 일찍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신문팔이·넝마주이를 하며 어렵게 공부를 하였지만 그 시절에 세계관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는 하늘 밖의 하늘도 볼 줄 알아야 하고, 변하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도 그리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이 영화는 수작(秀作)도 아니고 명작(名作)도 아닌 그저 그런 영화일 뿐이다. 굳이 말한다면 흥행해야 하고. 흥행을 목표로 하는 상업주의 영화인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지나간 것은 그리워하느니라.」는 푸슈킨의 시구는 언제나 우리를 감상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2014.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