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중우정치
민주정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 한다. 우매한 대중들에 의한 정치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정치를 할 때부터 나왔으니 민주주의의 태생적 한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고. 이에 제일 공감한 사람은 아마 플라톤일 것이며. 그래서 그와 대비되는「철인정치(哲人政治)」란 말도 그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민주정치의 최대 맹점은 조석변(朝夕變)하고 형체가 없는 사람의 마음을 민심이나 민의로 의제하고, 철학적이나 사회학적으로 군중(群衆)일 수밖에 없는 무리를 정치에서는 귀인 모시듯 하며, 국민들이 똑같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현인과 우인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것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국민들을 단순화하고 형식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독배를 들게 한 것이 일반 대중이었다는 사실은 민주정치를 논박하는 것으로 자주 이용되는 것이고, 1934년 국민투표에서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어준 것도 독일 국민인 것이다. 주식투자를 미인투표로 비교하는데 민주주의도 미인투표라고 보면 딱 알맞을 것이다. 객관적인 비교나 검토 없이 유행만 타면 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얼굴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동과 선전에 능한 자가 유리하다. 민주주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잘하는 자에게는 속수무책이다. 민주주의는 포장과 각색을 잘하는 자가 돋보인다. 민주주의는 공작과 조작에 아주 취약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이론을 완성한 존·로크나 장·자크·루소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부정적 요소들을 살펴보았겠지만 자칫하면 중우정치가 되는 걸로 알았지 상시적으로 중우정치가 되리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활동하던 당시 절대왕정에 대한 염증이 너무 커서 절대왕정이 아니라면 그 밖의 다른 제도는 이무거나 선택할 수 있다는 유연함 때문일 것이고, 당시 생성하기 시작한 부르주아가 지지하는 정체(政體)도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며,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앙의 소산이 정치에 영향을 준 탓도 있을 것이고, 위임과 통치라는 논리적 완결성에 너무나 그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로크나 루소는 앞의 요인이 뒤의 요인을 치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고, 앞의 요소가 뒤에 오는 요소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역사적 합리성」이란 것을 믿었을 수도 있고, 한 제사장시대에서 만인이 제사장 되는 시대로 옮겨지는 것처럼 역사도 한 군주시대에서 만인이 각자 군주 되는 시대로 이행한다는 발전적 역사관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현(賢)이 우(愚)가 되고, 우(愚)가 현(賢)이 되는 동양사상의 빛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목적으로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봉사하는 수단인 것이다. 민주주의가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제도가 아니지만 이보다 더 나은 제도를 발견하지 못한 이상 민주주의의 가치를 드높이고 유지·발전시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이론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에만 중점을 두었지 그 당시로서는 벅찼거나 너무 이른 것이라 생각했던 내용적 민주주의에 이젠 시선을 주어야 할 것이다..
-충분치 못한 민주주의이고, 약골(弱骨)의 민주주의지만 그 중에서 건질게 있다면「어미 게는 옆으로 기지만 새끼 게는 바로 기기를 바라는 것」이 중의(衆意)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민주정치가 철권정치나 병영정치보다는 우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가지 바란다면 민주정치가 중우정치가 되어 우리나라의 고질이 되고 풍토병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4.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