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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광인(狂人)의 살아가기

무릉사람 2019. 3. 10. 12:19

며칠 전에 읽은「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에서 지은이 고연희는 옛 사람의「소년이로 학난성 (少年易老 學難成)」,즉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말을 후기(後記)에 언급하면서「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말이 가슴을 때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말이 귓구멍을 후벼 파고 가슴을 쪼아야 할 사람은 고씨가 아니고 바로 내가 아니던가? 마치 소상팔경(瀟湘八景)중의 제일경인「소상야우(瀟湘夜雨)」에서 밤비가 거세게 대나무를 때리듯.

 

「소년이로 학난성」은 인생을 꽤 오래 산 사람들이 느끼는 세계 공통적인 인생의 소회이다. 그렇다면 나는「소년이로 학난성」의 인생에서 도대체 그 무엇을 대체(大體)로 잡았던 말인가? 종교와 철학. 국가와 민족 심지어는 사랑과 우정까지도 간당간당하고 덧없다고 보는 내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나의 가엾음을 가려주고 쓸쓸함을 벗해줄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과연 정을 붙이고 정을 줄 수 있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시를 읽는 것이 더운 물에 목욕하는 것보다 더 기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시를 읽는 것보다 더 기쁘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통속적인 고귀함이나 저속함 또는 이분법적인 저차원과 고차원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가 생겨나는 연기(緣起)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반면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공자처럼 세상에는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가시적인 것 못지않게 가치나 의미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을 추수(推數)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은 웬만한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고, 웬만한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웬만한 것에는 잘도 견디지만 배움 앞에서만은 쉬 부서지고. 쉬 깨지며, 쉬 무너진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선문답 같은 것. 백문(百聞)이 불여일견이 아니라 일문(一聞)이 불여백견한 것. 홍수에 강물이 범람하는 것보다 더 사람의 가슴에 범람하는 것. 태초에 말씀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 옛 이스라엘 시인이「내 가슴이 찔렸나이다.」라고 한 것.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 중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 바로 시어(詩語)이다.

 

윤동주의 시「서시」에서「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나 서정주의 시「자화상」에서「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은 진정 사람의 소리인가. 아니면 천상(天上)의 소리인가. 칠레의 노벨문학상 시인 네루다는 아예 시 제목으로「나는 오늘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시를 쓴다.」고 했고. 일본의 국민시인 이시가와 다꾸보꾸는 시「사향(思鄕)」에서「친구가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꽃을 사 가지고 와 아내와 희롱했다.」고 했다. 이것들은 과연 인류의 구원의 메시지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중국 송나라의 진소유는 시「작교선(鵲橋仙)」에서「칠월칠석 한 번 만남이 인간세계의 숱한 만남보다 영롱하리 金風玉露一相逢 便勝卻人間無數)」라 했고, 당나라의 진도는 시「농서행(隴(西行)」에서「가련타! 무정하 강변에 뒹구는 백골들 아직도 규방여인 꿈속의 사람인데」(可憐無定河邊骨 猶是深閨夢裏人)」에서는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찢어지며. 영혼이 통곡해야 하지 않은가.

 

자고로 공동체의 사람들과 지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광인(狂人)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광인의 기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에서 내가 가까스로 발견한 보배라고 할 수 있으며,「소년이로 학난성」의 인생에서 그나마 내가 건진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2014 0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