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면서생」의 나라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무관(武官) 심경지란 사람이 문관(文官) 귀족들의 전쟁에 관한 의론을 보고「백면서생들의 논의」라고 비웃은 이래 백면서생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고 애송이를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역사상의 대표적인 백면서생으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조괄과 조선시대 김경징을 들 수가 있다.
조괄은 조나라의 대장군 조사의 아들로 병법에서는 아버지를 능가하였다. 이윽고 조사가 죽고 조괄이 조나라의 대장군이 되었는데 호언장담과는 달리 진나라 장군 백기에게 대패하여 조군 40만 명이 몰살을 당하였다. 김경징은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의 아들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 방어책임자였으나 매일 술판만 벌이다가 청나라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어 어머니 부인 며느리는 죽고 자신은 도망쳤었다.
조괄과 김경징은 백면서생의 폐해가 어떻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문제는 이 백면서생이 구변만 좋거나 이론에만 강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예 사유조차 하지 않거나 아예 개념조차 없거나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의심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위협적인 것은 그 백면서생들에 의하여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안녕이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달랑 교과서적인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복잡다단한 것을 재단 하려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직접 가르침 받을 것이 있고 눈빛만으로도 배울 것이 있고, 신산(辛酸) 끝에 얻는 것이 있고 인고(忍苦)가 필요한 것이 있고, 시간이 가야할 것도 있고,
물론 일국의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들이 줄을 잘 섰거나 가문이 좋다거나 바이런처럼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나 연설, 또는 행위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할 일이 한 두 번 아닌 것이다. 빛나는 직책이나 화려한 명성이나 두터운 학식이 무색하리만큼 자격미달이나 수준미달의 인사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주는「도구로서의 인간」을 자처하고 제한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구로서의 인간 자체인 것이다. 도대체 자유와 민주라는 관념이 이들에게는 고대 알렉산드로스대왕 때의 그리스인이나 마케도니아인들보다 희박하고. 17-18세기 유럽인이나 조선의 정여립이나 중국 명나라의 황종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백면서생들은 군자불기(君子不器)에서 애서 그 기(器)를 자처하고. 공적영역보다 사적영역에서 뛰어나며,「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어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된다. 그들은 근본보다 지엽에 강하고. 근원을 찾는 어려움보다 말류에 안주한다. 그들은 천고(千古)동안 변함없는 사실. 저 장양호가 동관회고라는 시에서 말한「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고통. 나라가 흥해도 백성은 고통」이란 뜻을 알 수가 없다.
백면서생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악화(惡化)가 양화(良貨)를 몰아내고.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 사슴을 말이라 하는 것은 다반사고. 툭하면 동네 개 모두가 요임금을 짖어댄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거르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옛날 그리스에서처럼 투표로 추방하거나 로마 시대 검투사처럼 살아남은 사람을 쓰는 것밖에는-
-적어도 나라를 다스리려면 나라의 앞날이나 시대정신에 대해 아주 오래전 오자서가 하룻밤사이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한 그런 고민은 어렵다 해도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사회적 정의나 경제적 정의에 대한 개념정리는 물론이고 개방이나 관용 등에 대한 시대적 인식이나마 제대로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경멸과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 바라보아야 하는 것도 이 또한 괴로움인 것이다.
2013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