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기쁨」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본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이다. 그 바다는 문장(文章)의 아름다운 바다나 인정(人情)의 아름다운 바다가 아니라 한시바삐 벗어나야할 괴로움의 바다인 것이다. 사실 인생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폭풍우가 치는 바다가 아닌 것이 없다. 오죽 했으면 우리 조상들이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환해(宦海)라고 했을까.
불가에서는 고통이 있어야만 지혜가 확대되어 법열에 이른다는 말을 하고. 예수는 십자기에 매달리기 전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아버지여 나로 하여금 이 잔을 옮겨주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생각을 바꿔보거나 뒤에서 보거나 또는 지금까지 누런 안경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이제는 푸른색이나 보라색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한때 장안에 회자됐던「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란 말은 문화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말이었으나 오히려 인생의 곳곳에서 더 필요한 말일 것이다. 인생이 쓰리고 괴롭고 아픈 이른바「인생의 난파(難破)」에서 과연 인생에 구원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나 문학. 철학 등은 이에 대한 규명이었고 해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죽을 각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죽을 각오로 임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말이다.「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살아있는 거지가 죽은 왕보다 낫다는 표현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진실한 것이 있고. 단 하나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생명력」인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상 그 어떤 명분 그 어떤 가치도 이 생명력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지에 보면 관우가 조조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장요에게 이렇게 말한다.「나는 죽음을 알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안다.」고. 매우 호기로운 말이나 예외적인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순결한 부인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항해(航海) 중에「저승의 동굴」에서 그리스 최강의 용사였던 그 이름 아킬레우스를 .만난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보자 반가워서 이렇게 말을 건넨다.「아킬레우스여. 당신은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당신은 지상세계에서처럼 지금 지하세계에서도 최강의 용사로서 군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죽음에 대해서 그 어떤 말로도 나를 위로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디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세상에서 농토도 없고 재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의 머슴이 되거나 그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라고.
우리가 왜 인생을 긍정해야 하고. 운명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아킬레우스는 간결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노천명이 그녀의 시「이름 없는 여인」에서「두메산골이라도 내 좋은 사람과 같이 하면,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라는 말이나 억울하게 죽은 명나라의 시인 고계의 시 비가(悲歌)에서「부유한 노인 가난한 젊은이보다 못하고/ 좋은 여행 나쁜 귀향길보다 못하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폐부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2013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