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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힘」

무릉사람 2019. 3. 21. 23:44

이 세상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딱 하나만 하게 한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그렇다면 세상의 아버지들은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거나 새도 죽을 때는 소리가 처량하다는 심정으로「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제일 많이 들려줄 것이다.

 

그 올바름을 지닐 수 있게 하고.「근원」을 생각하고「본연」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일찍이 인문학의 가치를 꿰뚫어본 사람은 조선의 임금 정조였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쌓을 때 한 신하가「성은 견고하기만 하면 됐지 굳이 아름다울 필요가 있습니까?」하고 묻자 정조는 빙그레 웃으며「아름다움도 능히 성을 지킬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였다.

 

철학자 김종업은 그의 책「인격의 철학. 철학의 인격」에서「지식인은 자연적 표상에서 벗어나는 묘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이나 산을 단순한 강이나 산이 아닌 인간적 삶으로 들어오는 의미로써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뒤이어「자연적 표상을 넘어서는 언어로 자신을 무장할 때 지식인은 바로 무언가 남다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인문학도 이와 같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에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평면적 표상에서 입체적 표상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노련한 인문학도는 마치 노련한 도인(道人)을 닮아 상상적 표상을 통해서 언어나 문자의 한계를 넘어 무궁무진한 것을 볼 수가 있고 무궁무진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이란「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가당찮은 이야기」이다. 그래서「아름다움도 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정조 임금은 역시 호문(好文)과 호학(好學)의 군주였음에 틀림없고. 오늘날 그가 살아있다면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올바름과 사랑. 용서와 관용도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인문학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에 머물러 있던 우리를 비(非)가시적인 세계로 이끌어주고. 육안(肉眼)으로만 보아왔던 우리를 심안(心眼)으로 보게 한다. 가시적으로나 육안으로는 4성(星)의 반짝이는 별들이나 공안검사들의 검은 옷이 강력함으로 보이겠지만 비가지석인 세계에서나 심안으로 볼 적에는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이 가장 강력한 국방력이 되고 사회통합력인 것이다.

 

인문학은「사람들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는 것에 착안하고. 물질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의 한계를 알게 하여 정신적인 것이나 영혼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인문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땅에서 나왔을 때 가나안으로 곧장 가지 않고 40년 동안 시나이 사막을 유랑하는 그 역정(歷程) 자체이면서 소동파가 여산에 듦으로서 여산의 진면목을 몰랐는데 여산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멀리서 쳐다봄도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왕대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라게 할 만큼 감동감화력도 크거니와 한창 피는 꽃이나 한창 자라는 나무는 꺾거나 자르지 않는 연민의 마음이고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이 인문학적 교양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봄비에 연못이 넘치는 것과 오랑캐 땅에 봄이 왔지만 화초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2013 0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