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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에 오르면 생각나는 시

무릉사람 2019. 3. 21. 23:51

나는 젊었을 적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정독보다는 다독을 했었다. 그것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 것이었고, 당연히 중국 무협지도 그 속에 포함되었다. 지금 책명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와룡생」이라는 작가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으며, 무협지의 특성이「점입가경(漸入佳境)」의 구도라 하룻밤에 5~6권 전편을 완독하기도 하였다.

 

무협지의 내용은 대부분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극적으로 절대무공을 익혀 원수를 갚고 미인을 아내로 얻는 해피엔딩인데, 그렇게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과는 다르게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서 소일거리로 적합하였다는 것이며. 주인공의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박진감 있게 나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또 어렸을 적부터 시를 무척 좋아했는데 한창 때에는 우리나라 시조 대부분을 비롯해서 유명한 당시(唐詩)나 국내외 명시들을 줄줄 외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들 중에서 어느 한 수(首)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어쩌다 지인들이 시낭송을 청하면 종이에 시 구절을 적어서 낭송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시들은 나의 머리에서 실전되었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시가 있으니, 벌써 40년도 더 되었을 적에 어느 무협지에서 발견한 가을날의 풍경을 읊은 시가 바로 그 시이다. 나는 해마다 늦은 가을 산에 오르면 계절에 따라 기러기 떼가 오고 가듯이 이 시가 여지없이 생각나는 것이다.

 

이 시는 비록 절제와 함축이라는 고급의 형식도 아니고, 구태의연한 표현이나 통속적인 구절들이 낮은 단계의 시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때문에 낡은 사진첩의 사진들처럼 더욱 낯이 익고 정감이 간다고 할 수도 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옛 시인은 자신의 눈높이로 가을날의 풍경에 자신을 가운데에 두었던 것이다.

 

이 시는 늦은 가을날, 설악산 천불동이나 주전골을 찾은 사람의 심경이 담겨있고, 월악산의 붉은 산 빛이 대청호에 담겨있는 것을 보는 사람의 심사가 스며있다고 보면 된다. 어느 가을에 조락(凋落)이 없었고. 분리(分離)가 없었겠냐마는 이 시를 안 뒤로부터 가을에는 사람들이 더욱 쓸쓸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성긴 빗방울 스쳐 지나간 후

서풍은 더욱 찬데

일엽(一葉) 홍화(紅花) 속에 가을은 또 저무는구나.

첩첩산중 굽이돌아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한 점 저 먼 산을 넘어가니

정처 없이 표랑하는 나그네의 심정 처량하기만 하구나!

 

2013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