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자의「한계」
27년간 이 세상을 살다간 허난설헌의 3가지 한(恨)중에 하나가 김성립을 지아비로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은 아마 자연인 김성립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모든 남자, 조선시대의 모든 남자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에 대한 한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아비는 자신의 밑천을 죄다 지어미에게 드러내고. 아내는 남편의 전부를 봤을 때, 여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은 실망을 넘어 비극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물학적 한계가 있고 시대적인 한계가 있는 것인데 세상의 절반인 남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한계가 불가항력적인 아닌 것이 한계가 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찍이 징기스칸이 왕중의 왕(王中王)인 대칸이 되기 전 테무진이었던 시절. 아내 부르테가 메르키트족에 납치가 된 것을 테무진이 이를 구출하였다. 그런데 이미 아내는 그 부족 장수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아내 부르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내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군에게 끌려갔던 사대부의 여인들이 속전을 치루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환향녀이다. 그중에는 조선시대 명문장가요 우의정으로 신풍부원군 장유의 며느리도 끼여 있었다. 그런데 장유는 임금 인조에게「더러운 몸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니 이혼을 허락하고 아들이 새장가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우리는 여기 장유의 행동에서 아침저녁으로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시대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왕후장상(王侯將相)에 그 씨가 있느냐?」고 외쳤는데 만적은 세상의 일반론을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남자들의 최대치를 말한 것이었다.
한국남자들이「지평(地平)의 확대」와「관용의 정신」그리고「무한연민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저들의 최대치는 겨우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아프리카 우간다에도 있는 직함들로 국내용이며 누군가는 되는) 이고,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은 야스퍼스나 사르트르 같은 지성(知性), 괴테나 톨스토이 같은 문호(文豪)는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남자들이 계속 장유 같은 행동을 한다면「개꼬리 3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는 꼴이 날 것이고, 저들은 겨우「와각지쟁(蝸角之爭)」이나「도토리 키 재기」식에만 만족할 수 있을 뿐이지 저 천하를 놓고 다투는「축록지전(逐鹿之戰)」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2013 0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