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國家)는 무엇인가?
1.
요즘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의해서「통합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국가관(國家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언론장악, 민간인 불법 사찰 등), 인명을 경시하는(용산참사)사람들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보며, 고뇌하지 않고 빈약한 생각에 기초한 문제 지적은 자칫 우리 모두를 제한하고 속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살펴보면 국가란 씨족→부족→국가라는 발전단계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란 인간의 사회성에 따라 확대되는 군집현상이다. 고쳐서 말하면 국가란 인생의 목적인「자아확립」또는「자기발전」을 실현하는데 가장 적합하고 가장 효율적이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즉 필요성에 의한 산물이지 그 어떤 자연원리의 작용이 아니라는 것이며, 긴요할 수는 있어도 사활(死活)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의 곳곳에서 (인류)의 보편타당성과 국가가 충돌하여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국가에 동의하는 것은 자유의 확보 때문인데, 그 자유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창한「억압의 부재」로부터 헤겔이 말한「무l질서의 부재」로 이어져, 공포. 빈곤. 질병, 무지로부터의 자유도 포함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생명존중과 절차의 정당성.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헌법적 가치이기도 하다.
국가가 사람들이 위탁한 의무를 저버리거나 소홀히 할 때, 즉 국가가 인권탄압을 하고, 인간의 이상을 흐리게 하며, 소수나 기득권자 중심으로 정치를 하면 사람들은(옛사람들은 이를 천명의 이동이라 했다.)국가체제를 변경하거나 국가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 구성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낙담시킬 때, 국민들은 국가를 넘어 더 넓은 세계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보편성인 것이다.
2.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대상도 아니고. 성역도 아님도 자명해 지고, 무리한 국가관이나 애국주의는 파쇼들의 준동에 휘둘리기 쉬우며, 국가의 건강지표이자 활력인 다양성과 개성을 말살하는 것임도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협조하거나 헌신한다고 해서 꼭 애국자도 아니고. 국가를 경시한다고 해서 반드시 반국가주의자나 반국가사범도 아닌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반정부(反政府)를 반국가(反國家)로 모는 작태를 수 없이 목도 했고.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와 이의 원조인 진시황에게서 국가와 군주를 분리하지 않는 폭정을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 루소의「그들만의 전체의지(사욕(私欲)))를 마치 일반의지(공론(公論))양 꾸며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국가를 팔아먹는다.」말을 수긍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제후의 영역과 대부(大夫)의 영역을 말하고 국가는 선비 사(士)에서 알 수 있듯이 직업군인인 무사(武士)나 전사(戰士)가 나라를 지켰고,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성인남자가 군인이 되고 로마에서는 유산(有産)시민이 자비로 무장한 것이나 플라톤이 이상국가(理想國家)의 무사계급은 용기가 정의라 한데서,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크샤트리아가 전사인 것을 생각하면 역사상의 모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들
저 백이숙제부터 조선의 성삼문에 이르기까지 봉작(封爵) 봉록(俸祿)하고 명예를 주는 알아줌에서 나온 것이 충성임을 감안하면 국은(國恩)을 많이 입을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더 막중한 것이 되고 반대로 국가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능성은 낮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망국의 한, 또는 망국의 서러움은 자아확립의 기회를 상실한 사람의 정서임도 확연해 진다.
서로마제국이 망해 그리스도 교인들이 충격에 빠지고 혼란에 휩싸이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을 위무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위해 신국(神國)을 저술한다.「신의 나라는 영원하나 땅위의 나라는 로마라 하더라도 시효가 있으며 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보는 안사의 난(亂) 와중에 춘망(春望)이라는 제목의 시에서「國破山河在」라 하여 나라는 깨지기도 함을 보여준다. 동과 서에서 천재들의 놀라운 일치인 것이다.
3.
유학의 한 갈래였던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오자 다른 학문은 죄다 사문난적이 되었고, 성리학은 우상으로 받들어졌다. 사상(思想)이란 물이 유입되고 배출되는 호수 같은 것임을 모르는 우리의 조상이나 지금 우리는 오십 보 백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둠이 심해도 빛은 비추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선각자가 있었고. 다른 나라에도 선각자가 있어 우리를 한껏 고무시켜 준다.
먼저 중국 송나라 때의 개혁사상가 왕안석은 왕소군을 회억(回憶)하는「명비곡(明妃曲)」이라는 제목의 시에서「한은은 얕고. 오랑캐의 은혜는 깊다. (漢恩自淺 胡自深).」고 하였는데 이는 왕소군을 몰라주던 황제 원제나 화공 모연수 기타 궁녀들을 폄하하고. 그녀를 대우한 흉노의 선우나 부족민들을 칭찬한 것이다. 이것을 안타깝게도 사마광을 비롯한 대신들은 중국을 비하하고 오랑캐를 높였다고 비난했는데 왕안석은 그들의 춘추대의에 입각했을 뿐 아니라 인류라는 보편성에 섰던 것이다.
간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의「진리는 국가보다 앞선다.」는 말은 그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는 방편일 뿐이라는 언급은 루소의「진리를 위해서 신명을 바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그것은 또 러시아로 가서 톨스토이의 회심을 가져오고 우리나라에서는 다석 유영모선생이 있어「진리만이 기쁨」이라는 말과 해후한다. 여기에서 진리만이 사람을 자유하게 함도 알게 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진묵대사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호국불교의 전통아래 임진왜란에 참천했지만 진묵대사는「왜군도 자비의 대상이다」라고 해 어떠한 살생도 거부하고 깊은 산에서 수행에만 정진한다. 누가 우위이고 누가 아래란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휴정이나 유정은 현상 또는 개별성을 택했지만 진묵대사는 본질 또는 보편성을 택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이퀴나스 같은 교부 철학자는 국가를 신의 섭리로 보았고 헤겔 같은 대학자는 국가를 절대정신으로 보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고정되고 불변적인 것은 생명력이 없으나 국가는 유동적이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인 것이다. 바란다면 국가는 가능한 한, 국가의 외연을 넓혀 구성원들의 공간을 넓혀 주어야 할 것이다.
2012년 6월 20일
32년 오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