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보수」는 없다.
한나라당 비대위에서 정강정책상의「보수」라는 용어를 삭제하려다 유야무야로 끝난 것을 보고 필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인가에 대한 의문이 그 첫 번째이고 보수가 장식적 선언적 명목적이라 난도질 당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보수라는 뼈다귀를 우려먹으려는 딱한 사람들이 있다는 어처구니가 그 두 번째이다. 우리가 보수의 본래적 의미를 안다면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보수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수를 참칭하는지 그리고 보수에 기생하는지 쉬 알게 된다.
.보수는 진보의 결과물이다. 진보가 길을 개척하면 보수는 도로로 만들고, 진보가 척후병이면 보수는 본대이며, 진보가 항수라면 보수는 변수이고 진보가 발광체이면 보수는 암체인 것이다. 이렇게 보수는 진보에 코뚜레 되는 운명이지만 그 운명 지어짐이 마치 빈한한 민비가 대원군의 상상을 초월하듯 우리가 말하는「보수의 가치」나 「보수의 자랑」또는 보수의 강점」이 되는 것이다. 보수는 그 운명적인 것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정신을 지닌다. ①보편성 ②가치성 ③솔선성 ④청렴성 ⑤희생성 ⑥책임성 ⑦관용성 ⑧자비성이 그것이다.
①보편성이다. 보수는 특수성이나 개별성, 고유성보다 보편성이나 세계성을 선호한다. 민족과 인류. 국가와 세계가 충돌할 때는 기꺼이 전자를 양보하고 후자를 선택한다. 찰라보다는 영원을, 소아(小我)보다는 대아(大我)를 생각한다.
②가치성이다. 보수는 가치 지향적이다. 소인은 이에 밝고 군자는 의에 밝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역, 학교, 혈연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나 공동선 같은 공통된 가치를 중심으로 뭉친다. 야만적인 것에 등 들리고 문명적인 것에 줄을 선다.
③솔선성이다. 보수는 본을 보인다. 마치 예수가 제자들 발을 씻겨주듯. 흠춘과 품일 두 장군이 아들 반굴과 관창을 사지로 몰 듯. 중국 홍군의 지휘자들이 장개석군의 지휘자들과 달리 앞장서서「돌격. 앞으로!」하듯
④청렴성이다. 도덕성도 된다. 권력자가 권력을 핍손하게 행사할수록 감동을 준다. 제갈공명이 후세인의 찬탄을 받는 것은 공정무사함 때문이다. 수도사적이 못되면 보수에서 떠나야 한다. 보수는 자칫 경직되기 쉬운데 청렴결백하지 못하면 생선가게에 고양이신세로 전락한다.
⑤희생성이다. 보수는 길을 닦았지만 도로 사용료도 받지도 않거니와 아무나 왕래해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보수는 오로지 사람들의 이용후생에만 만족할 뿐 공치사나 이름을 팔지 않는다. 헌신만 할 뿐 수모는 내 것이요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⑥ 책임성이다. 보수는 올바른 책임을 안다. 선장이 배가 조난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탈출하거나 배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등의 궤변으로 호도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기를 상대화하여 반성하는 것이 진정한 책임성임을 안다.
⑦관용성이다. 보수는 안팎. 상하로 제한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상이나 주의를 차별하지 않는다. 적의 적은 동지임도 알고.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음도 잘 안다. 일률적으로 규정하지 않거니와 일사불란도 싫어한다. 모든 것은 한 때의 소장(消長)이라는 통찰력이 있다. 즐거이 마치 로마가 호수가 되어 모든 문명을 받아들이고 재분배했듯 그 호수가 되려 한다.
⑧자비성이다. 긍휼성도 된다. 보수는 일체의 죽어가고 스러지는 것들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살생유택은 언어의 장난이고 일체의 살생을 거부한다. 연고가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닌 무연자비를 안으려 한다.
이렇게 대강 보수를 정의해 봤지만 어찌 보수가 여기애만 그치겠는가. 보수라고 말은 했지만 어쩌면 보수는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의 총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극히 이기적이고 기득권유지에 급급한 사람들에게서 잘못된 보수를 본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눈알을 부라린다. 보수가 앞서 지적한 가치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이광수로부터 이어져온 전체주의 찬양 즉 파쇼일 뿐이다. 매스컴은 굳이 한나라당이 보수이고 민주당은 진보라고 규정하지만 민주당이 보수이고 한나라당은 극우라고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스컴과는 달리 한국에는 보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2012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