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박근혜와 「원칙주의」

무릉사람 2019. 3. 29. 21:43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원칙의 사람이라 하고.원칙을 브랜드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지금 그 원칙의 사람이 이명박정권의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는데 과연 성공하여 비룡(飛龍)이 될 것인지가 모든 사람의 관심사다. 매스컴에서는 결과에만 치중할 것이나 그것은 한 정치인의 부침과 정당의 이해관계에 불과한 일, 원인은 한국정치의 수준과 발전에 관련된 것이라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박위원장의 생각과 사상은 그리 노출되지 않았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보수당 틀에서 보다 우경화 된 정당의 책임자라는 것. 그리고 세종시 관철에서 볼 수 있는 원칙고수가 비교우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섣불리 박위원장을 원칙주의자라고 규율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원칙 또는 원칙주의를 유추하고 해석하는 것도 한국정치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먼저 원칙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것인데, 원칙이란 사람과 사물에 두루 적용되는 근본규칙 또는 근본법칙이 사전적 정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 공동체(국가·사회)의 존립에 꼭 필요한 것으로서약속은 지켜야 한다.」「정직해야 한다.」 「책임성의 비례같은 것으로 법 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윤리를 포함하는 자연법이 그것일 것이다. 이런 것(원칙 또는 원칙주의)1차적으로 우리가 바탕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막아주고 2차적으로는 바탕을 유지·결속시키는 데는 유용하다.

 

그러나 이것까지가 한계인 것이다. 그것이 단지 역사가 아닌 역사성을 지니고 진선진미(盡善盡美)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원칙은 우리에게 정의에 사랑이 대비되는 것처럼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선의였거나 선량하다고 해서 책임을 다했고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칙 또는 원칙주의는 우리를 정()이 되게 하지만 한단계위인 합()에 이르게 하는 반()을 끌어올 수는 없는 것이다.

 

원칙 또는 원칙주의는 저변을 다지는 데는 유용한 도구이나 외연의 확장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원칙주의는 고루하고 허망한 형식주의로 끝난 것이 많다. 병자호란 때 김상헌은 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내세워 주전론을 펴서 조선의 충신은 되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송시열은 춘추대의를 내세워 효종의 법통을 부인함으로써 주자(朱子)에 이은 송자(宋子)의 소리를 듣지만 그게 다였다.

 

이렇게 원칙 또는 원칙주의는 상·하단 밴드로서 제한을 두고 논리실증주의를 답습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출이나 용출은 있을 수 없고, 가두고 묶어두려는 성질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용()이고 변()인데 원칙주의는 정치의 종교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는 원칙주의는 겨우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니 강을 건너는 적군을 기습하지 않아 나라를 망친 송양공이나 정의조차 훔치지 않은 간디이니 그 외의 사람은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칙 또는 원칙주의로는 개방과 관용. 융합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오직 상대주의에 기반을 둘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원칙 또는 원칙주의는 독선과 독존을 낳을 뿐 상대주의에 설 때만 병존과 병행이 성립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상대화하여 성찰하고 반구((反求)할 때 기본의 말처럼 그는 어느 새 강물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호수가 돼 있을 것이며 루쉰의 말처럼 길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돼 있을 것이다.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고.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으며 더구나 권부(權府)는 유곽(遊廓)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박위원장이 원칙주의자를 자처하고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아직 원칙을 논할 정도로 진화하지 않는 한국정치도 문제지만) 박위원장에게 그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볼 것이다. 원칙주의는 대부분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그 운명이 흐름(flow)이 아닌 저장(stock)이기 때문이다.

 

20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