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 파수꾼인가, 애송이인가?
에스앤피사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패닉으로 몰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도 초유의 일이지만 2008년 리만 브라더 사태가 다시 터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우리 모두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 증시만 해도 6일 동안 날아간 돈이 231조라 하고 정부는 제 2외환위기를 막기에 급급할 뿐 사람들이 눈물 뿌리고 투신자살하는 것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히 시계제로의 상태인 것이다.
일찍이 여말선초(麗末鮮初) 사람 원천석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둘러보고「흥망이 유수(有數)하다.」라고 말하였다. 흥망은 전쟁의 승패와 같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미국도 로마가 멸망했듯 망할 것이고, 대영제국이 쪼그라든 것처럼 쪼그라들 것이지만 그것은 현상을 과학자가 말할 때「운동의 법칙」으로 말하고, 역사가는「춘추대의」로 신학자는「신의 섭리」로 말하는 것을 신용평가사는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간의 컨센서스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축을 울리고, 금융 쓰나미를 야기한 이번 사태에 대해서 에스앤피사는 그 목적성과 방법론에 있어 당연히 타당성을 추궁 받아야 하는 것이다. 신용평가사의 업무는 주지하다시피 나라와 기업의 신용평가이다. 신용평사는 그 속성상 사전적 예견적 방어적 입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가장 엄밀하고 정치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위험회피가 최우선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진정 시키고 제한시키는 것이 보다 성숙한 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신용평가사는 1997년 우리나라 외환사태에서 보았듯이 사태를 부추기고 부풀려 강대국과 투기세력들에게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겨주었다. 이번 미국 신용 등급의 하락으로 촉발된 충격을 에스앤피사가 인지하지 못했다면 무능력한 것이 되고, 인지했다면 무책임한 것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로스 차일드가와 워렌 버핏의 신구 재벌, 민주당과 공화당, 유대인과 유색인(오바마)의 갈등과 대립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면 도덕성의 하자로 더욱 그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법언에 보게 되면「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앞에서는 무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구현 이전에 정의구현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에스피앤사가 놓친 것이고 무시한 것이며 우격다짐한 것이다. 교각살우(矯角殺牛)가 이 경우이고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대 교수인 폴 크루그먼 교수가 이들을「애송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어느 사람들은 이들을 용기 있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스스로는 파수꾼 또는 예언자로 인식하는 발언을 하나 그것은 소영웅주의 아니면 나르시즘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권력자로 알았으나 그 핵인 책임성은 없었다. 중국 위나라의 새파란 애송이 권력자 조상은 공명까지 물리친 사마중달의 주도면밀함에 걸려 결국은 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일어서는데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다. 애송이들에 의해서 나라가 결딴나는 경우이다. 애송이들의 객기나 치기는 이렇게 위태한 것이다.
빚이 많은 나라는 신용등급 강등은 물론 파산도 감수해야 하지만 에스앤피사는 이번 신용평가사정에서 신중하고 사려 깊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사람들은 파국과 후퇴가 오더라도 질서정연한 것을 원한다는 것이고 혼란과 충격은 완화되고 여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도매금으로 마치 옛날 중국에서 부견의 100만 대군이 사현의 6만 대군에게 패하는데 급기야는 초목이 모두 적군으로 보이고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조차 적군의 함성소리로 들리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은 에스앤피사는 드러난 애송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애송이들이 각국 정부 기관 업체에 많다는데 있으며 이들이 우리의 생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중대성과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애송이들이 흉기(완장)를 쥐고 있는 세상, 이러한 것을 팔자소관이라 하거나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2011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