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대통령은 생략함)에 대한 논쟁만큼 첨예하며 치열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가지가 가지를 낳고 지류가 지류를 낳지만 약점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 장점만을 침소봉대하는 등 대부분 정파적 입장이었지 방점을 찍는 글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인물을 추적할 때 박정희만큼 아쉬움이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찍이 사마천은 애정과 탄식을 역사 기술에 도입했는데 이는 내면을 보자는 것이고 뒤태를 보자는 것일 게다.
1. 물질적 근대화, 정신적 근대화
박정희의 탁월한 점은「곳간에서 인심 나고,」「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체득했다는 데 있다.「소도 비빌 둔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나라가 있어야 장차 정의도 설 자리가 있는 것이며 억조창생의 생명도 보존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 생각은 일제식민지, 6.25사변, 60년대 보릿고개를 보낸 세대들의 장점이었고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경사는 어느 한 쪽의 소홀을 낳는 법, 정치가 가치배분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일렀을까. 그것은 200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영적 존재라는 것,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몇 번의 천둥이 치고 또 몇 번의 무서리가 내려야 했다. 우리는 물질적 근대화에는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같이 가야 할 정신적 근대화는 아직도 못 이룬 것이다. 요즈음 보고 있는 하드웨어의 몰락은 이것과 상관성이 있을 것이다.
2. 항일과 친일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시대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누구나 대일본의 시대가 왔다고 믿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 보니 친일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나 출세를 하기 위해서 일본 관리가 되고 군인이 되는 것은 오늘날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육당이나 춘원 같은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세계정부이며 조선인은 세계시민이 되는 것이었으니 하물며 보통사람들이야, 그러나 그것은 비난할 성질은 못 되나 추앙은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김좌진과 홍범도, 장준하와 김준엽, 이회영 집안은 같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분연 항일운동을 했던 것이다.
자기희생을 한 사람과 보통 사람의 길을 걸은 사람은 격이 다른 것이다. 인정으로서 이해하는 것과 추앙하고 존경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풍찬노숙을 하며 오매불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과 일신을 생각한 사람을 동렬이나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이 누구고 우리의 사표가 누군지는 자명한 것이 된다. 그것이 정의이고, 그것이 민족의 자존심이며 그것이 나라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3. 5.16쿠데타와 도덕성
박정희는 무력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렸다. 민주적 과정이 아닌 무력(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탈취)했다. 전통적 정치사상 관점에서는 물리력으로 정권을 잡았으므로 춘추오패(春秋五覇)나 고려의 무인정권정도로 경시되거나 무시될 것이고, 춘주의 역사기술방법에 따르면 사도가 정도를 능욕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선양이나 찬탈, 전복이나 개창 등 어느 명목이로든 법철학상의 고민「누가 이를 제제(制裁)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 정부로서의 실체는 인정을 받지만 권력 탈취과정과 유지과정에서의 원시성·조악성·포악성은 언제나 악명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거병(擧兵)이나 기병(起兵)자체의「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원죄성(原罪性)은 권력의 요행성과 우연성을 확대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한다고 볼 것이고, 그가 아마 하찮게 봤을 후임 대통령들보다 도덕적으로나 법적 지위나 직책의 권위 면에서 훨씬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하는 공물이라 누구나 취하면 주인이지만 문명사회에서 쿠데타는 숙명적으로 음습할 수밖에 없으며 나중의 공적이 아무리 빛나더라도 부분적으로 치유되고 전환될 수 있을 뿐 전체를 바로 쓰는 일은 없는 것이다.
4. 민주주의 파괴자인가. 민주주의 파종자인가?
어느 정도의 경제적 성취를 이루어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정설이 되었다. 경제발전이 지도자 한 사람의 공이냐 국민 전체의 힘에 의한 것인가는 차지하더라도「말 타면 경마하고 싶다.」고 잉여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절대빈곤이나 유한(有閑)이 없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박정희는 5.16과 유신헌법을 보더라도 자신을「절대정신」「결단주의」「근본규범」으로 생각했다. 민권의식은 태생적으로 없었다고 볼 것이고. 모험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장식이었거나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노심초사 애쓴 경제는 민주주의의 배양지가 되어 드디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역사에서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파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신만이 아는 것이며 역사의 신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5.박정희의 극복을 위하여
박정희는 수직적 사고에는 그럴듯하나 수평적 사고에는 어색한 사람이었다. 의식주만 해결되면 야만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양을 쌓아야만 야만에서 벗어남을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 제약 때문일 수도 있고, 개인적 역량의 미흡에 기인할 수도 있다. 또 박정희는 창조적 소수를 꿈꾸었으나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지배적 소수로 끝을 맺었다. 진퇴(進退)의 미학 과 대체(代替)의 숨은 뜻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무릇 지도자를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과연 그의 삶에 천하가 같이 살고(天下同生)천하가 같이 죽는(天下同死)성격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의외로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앞으로도 한국정치의 압축으로서 언제나 살아나와 재평가되고 재해석 될 것이고 모든 지도자가 다 그렇겠지만 박정희는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 대왕암으로써 호국의 정신이 된 것처럼 아마 스틱스강(江) 저 편에서 오늘도 우리의 강산을 보고 있을 것이다.
2011년 8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