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탁(假託)」
☆프롤로그 -
오랫동안 불암산 아래에 살다가 돈아(豚兒)가 관악산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가 힘들다고 해서 봉천동으로 이사한 것은 2006년 2월 18일이었다. 내가 마지막 직장을 박차고 나온 것은 한 해전 2005년 역시 2월 달이었다. 답답해서, 무료해서 전국의 이름난 산과 명승지를 찾았지만 그것도 지나쳤는가. 정신적 피로현상이 왔다.
내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백면서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개석(蔣介石)과 도고 헤이하치로(쓰시마 해전의 영웅)가 추종한 왕수인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라는 생각에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난 예수나 카빌라성을 떠나는 석가모니의 실증주의적 계보를 잇는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눈곱정도밖에 안 되었다. 차라리 일용할 돈. 어느 때는 「횡재」가 비극적 결말을 잉태할 수 있음에도 또 하나의 「김첨지」되어 봉천역 부근 인력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아! 그것은 좋게 말하면 조공(助工), 그냥은 잡부였고 이 세계의 용어로는 데모도이다. 2007년 4월 아직도 한기가 느껴지는 어느 날. 안양의 한 정육점 바닥 마감 공정이었다. 60세가 넘게 보이는 미장기술자 분이 나를 보더니만 「이런 일을 안 해본 사람 같은데∼」라며 이것저것 물었으나 나는 이백처럼 「소이부답(笑而不答)만 했다. 2007년 여름 어느 무더운 날 신림동. 주택을 새로 단장하는 공사였는데 나는 2층에 벽돌. 시멘트. 모래를 등짝 또는 질통에 지며 올리고 있었다. 그때 한 50세 정도 되는 말쑥한 차림의 신사가 내게 길을 묻더니만 「도저히 이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된 겁니까?」하는 것이다. 그때도 나는 파인(巴人)의 평양성 아낙 되어 그저 웃을 뿐이었다.
2008년 10월말의 스산한 어느 날 도봉구 방학동의 주차장 펜스 설지 공사. 하루일이 종료되는 시간쯤인데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당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주유검이 황제의 만세를 비는 정자인 수황정(壽皇亭)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실을 모르고. 서릿발 같던 조선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가 어처구니없게 손자 연산군에게 가슴을 받혀 죽는 세상의 역설(逆說)을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에필로그-
「나 혼자 푸르고. 나 홀로 깨었네(我獨靑 我獨醒)」같은 기상은 굴원 같은 명문출신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겨우 파초의 김동명, 허난설헌과 이웃하여 태어났음에 만족해야 한다. 나도, 한나라 무제 때의 사람 종군(綜軍)이 도성 출입의 표시로 수문병이 천 조각을 잘라주자 「내가 이다음에 이 문을 나설 때에는 높은 사람이 되어있을 터인즉 이런 것은 필요 없다.」며 천조까리를 내 동댕이친 그런 기백이 일찍이 있었다. 잚은 날에는 이백처럼「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심을 반드시 쓰일 곳이 있기 때문이다(天生我在 必有用).」는 말에 힘입기도 하고 눈멀기도 하였다. 세월은 유수와 같았다. 사람을 알아주는 유비를 만난 제갈량을 부러워하고. 주군 인조를 잘못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임경업을 동정하며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연애를 흉내를 내는 것도 잠깐.
한퇴지의 「시대와 운명이 모의하여 천리마를 죽이는구나!」라고 계속 강변을 하지만 「상가집 개 」라고 스스로 폄훼한 공자의 「흐르는 것은 이와 같아, 밤낮없이 흘러가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하며 유한한 인생을 탓하는 것을 꼭 닮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가와 다꾸보꾸의 시「사향(思鄕)」속의 「친구가 출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꽃을 사 가지고 와 아내와 희롱했다」는 구절은 나의 손사래였고, 두보가 태풍에 띠풀집이 날아가자 「어찌하면 넓은 천간 만간의 집을 지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과 함께 얼굴 한 번 펴 볼 수 있을까(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具歡顔).」하는 고상한 마음은 언감생심인 것이다.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이 개봉에서의 수인(囚人)생활 중에도 홍안(紅顔)이 퇴색됨을 제일 실망하고, 임호가 황진이의 무덤에서 또한 홍안을 못 잊어 하듯이 내게도 홍안은 또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아! 몸은 비록 이규보가 최충헌정권에 의탁하고, 완적이 사마씨 정권에 기탁한 것처럼 살았지만 조선 정조의 문체반정 때문에 불우하게 살다간 이옥처럼 역시 북송 인종의 문체반정 때문에 불우하게 살다간 유영(柳永)의 「그래도 이 내 몸이 백의재상인 것을(自是白衣鄕相)」에서 실날 같은 희망을 발견하곤 한다. 비록 개화당 인사들을 길러낸 백의 재상 유대치는 못되더라도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처럼 「뉘 알겠는가. 머리 허옇게 세어도 애국열정 식지 않았는데∼(有誰知 髮誰殘 心未死)」의 열정만 간직할 수 있다면 감지덕지인 것이다.
비파 타는 여인에게 백낙천이 「우리는 모두 하늘가에 떠도는 신세. 이렇게 만났으니 어찌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을 탓하리요?(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하며 「아름다운 것은 우연히 오며 그것을 우리가 찾으려 할 때는 이미 없어진 뒤다.」라는 철리를 안 것은 망외의 소득이며, 「즐거움의 끝의 슬픔」이라고 한나라 고조 유방이나 당태종 이세민, 조선 태종 이방원의 심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이삭줍기 중에서도 꽤 큰 이삭이었다. 그래도 내가 삼국지의 조조를 높이 사는 것은 그가「열사는 나이 들어도 비장한 웅지 꺾이지 않는다네(烈士暮年 壯心不已)」를 이해할 만치 교양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2011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