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광림교회. 북한
성질상 좀처럼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는 삼성. 광림교회. 북한을 한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다면 바로「세습」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동기유발」과 「자기계산의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데 세습은 자본주의의 정화(精華)로서 삼성은 말할 것도 없고 광림교회와 북한도 자본주의의 수혜자로 볼 수 있다.옛날 각 왕조의 창시자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형이라고 불 수 있으니 태종 이방원이 처남들과 충녕의 장인을 죽인 것은 왕조의 만세안녕을 위한 계책이었으며 황제에게는「만세(萬歲)를 부르고 왕에게는「천세(千歲)를 부른 것도 다 자본주의를 축원하는 소리이다.
자본주의가 오늘날 다른 경제논리들을 물리치고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수 있으리라 예측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속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므로 기꺼이 목숨도 바치게 한다, 전국시대의 자객들인 형가. 예양. 섭정에게 「동기부여」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의 영역」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개와 말의 수고 이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월왕 구천이 부차가 아플 때 그의 인분을 맛본 것은 자본주의를 이해 못하면 어림도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동기포착」을 능사로 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150%, 200%의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고됨을 잊는 것은 약과이고.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으로 하여금 한 달도 안 되어서 다시 매혈을 하게 하는 것도 계량적인 것이었다. 확실히 자본주의는 중세를 몰아내고 근대를 열었으며, 땅에 매인 사람을 자유롭게 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에 만족할 수 없다는 개척자적 정신을 갖게 했으며 또한 변혁의 논리로 작용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역풍을 맞으니 사해(四海)에서 통용되는 것을 외면할 때이다.
성골(聖骨)에게만 이어진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걸출한 창업자를 닮은 자손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도 그렇고.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에서 보듯이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것에 기초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우생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동종교배가 오래 못간 사실이 더욱 그런 것이다. 「어떻게 이룬 강산이고. 어떻게 이룬 교회이며 어떻게 이룬 기업인가?」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에서 「아들」로가 아닌. 「같은 무리」에서 같은 무리에게가 아닌. 「인류」에서 「인류」로「한 무리」에서 「다른 무리」로가 대답인 것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의 오리지널 버전인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인간의 욕망」을 보았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간의 욕망만으로는 사람행세를 할 수 없으니 「날고기를 요리하듯」「원석(原石)을 가공하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정신적 만족을 주는 것이니 그동안 우리가 지탄한 양명학과 대비되는 주자학의 저 천명은 이동한다는 「천명사상」이 그 하나이고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공물사상」이 다른 그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옛것을 가지고 오늘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표준적인 것들에 입각할 때 우리는 천동설의 세계에서 지동설의 세계에서 산다고 볼 수 있고 야만에서 문명으로 들어왔다고 볼 것이다.
풍찬노숙을 하고, 천막교회를 하며, 잠을 못자고 못 먹으면서 못 입고서 일궈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원초적이고 경험적인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니 도덕이나 정의감 등과 같은 상위가치이자 치열하면서도 격렬한 고뇌가 그것이다. 마쓰시다 고노스께나 카네기 같은 사람이 나의 자손일 확률은 아주 낮고 국상 을파소나 정조 이산 같은 사람도 그러하다. 잘못하면 애써 이룩한 제국(帝國)이 한 때 중앙아시아에서 흥기했던 티무르의 꿈이 될 수 있고, 부의 상징인 석숭의 신세기 될 수가 있다. 2세 3세로의 세습이 꼭 축복이라 말할 수 없고. 족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다. 육신은 진토가 되고 피도 증발하나 정신은 남는다. 사람들은 육신적 피가 몇 방울 섞이고 튄 것에 기뻐하나 진짜 중요한 것은 정신의 교감이다. 진짜로 유지(遺志)가 이루어지는 것은 혈통의 계승이 아닌 정신의 계승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육신의 세습이 아닌 정신의 세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도통이 다른 성씨(異姓)의 제자에게 전해지듯 학문 밖에서도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삼성. 광림교회. 북한은 능히 할 수 있다.
창업자의 노고를 누가 모르겠는가! 내 강산, 내 왕국을 내 핏줄에게 전해야 한다는 군왕적 생각도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는 당대주의(當代主義)를 요구한다는 것을 안다면 겸손해 질 수 없을까? 나는 진창 같고 잔도(棧道)같은 길을 고속도로로 만들었지만 그 길은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 말을 납득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소성(小成)에 만족하고 소절(小節, 작은 절개)을 지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2011년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