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나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 살면 살수록 「무엇 때문에 살고. 왜 사는가」하는 실존적 질문에 봉착 하곤 한다. 많이 배울수록 많이 가질수록 더욱 허전하고 미흡하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을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도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가리켜 「정신의 황폐, 정신의 몰락」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물질만큼 정신이 따라주지 못한 탓이라고 이구동성(異口同聲)한다.
선진국가는 물질적 근대화와 더불어 정신적 근대화도 병행함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사황의 아방궁이나 한고조의 미앙궁을 폄훼하고.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을 높이 치는 것은 사람은 의미를 찾는 존재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유물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한 것이고. 문화적 여유도 있는 것이지만 경제란 것은 정부가 시시콜콜 참견하지 않아도 크루즈 미사일처럼,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스스로 알아서 작동한다. 우리는 그것을 시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신의 근대화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1인당 국민소득 3 만 달라 5 만 달러를 달성하더라도 (참고로 2009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을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16,700달라도 예측했다) 의식이 높지 않으면 그것은 돼지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 격이고. 원숭이가 갓 쓰고 도포 입은 것으로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볼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니 위정자들이 우리 국민들을 알기를 돈 버는 기계나 돈만 아는 경제적 동물로 생각하는 것으로서 국민들에 대한 경멸이자 모독인 것이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일전에 고향친구들과 현대 한국의 제일을 다투는 시인 백석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길상사의 옛주인 자야(子夜) 김진향여사는 「백석의 시 한 수 한 수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은 자기 기준이 있는데, 보고 배우고 익힌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하루아침에 유토피아가 되고 무릉 도화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름과 실제가 똑같았다. 지금처럼 신분과 교양, 지성이 겉돌지 않았다. 그때에는 「읽은 것이 춘추(春秋)뿐 」이라 목숨을 바쳐야 했고, 지금은 법률, 공학. 의료 등의 단순한 기술직이라 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얼을 요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과거시험에서 시문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것이 정신의 영역악ㅎ 영혼의 분야임을 알은 탁견인 것이다. 이만큼 우리 민족은 정신과 문화에 예민했었다.
오늘 내가 남루하고 초췌하지만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펴는 것은 권력이나 부가 잠시임을 알기 때문이고. 내가 오늘 백안(白眼)를 흉내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지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 그때그때 내가 머무는 곳에 최선을 다 하고. 이따금씩 지나온 자취에서 아쉬움과 서운함을 느낄 때. 우리는 어느새 원효가 되어 있고 매월당 김시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2009년 7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