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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만능이 아니다

무릉사람 2019. 4. 1. 22:19

요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정치적 관점에 따라 해석들이 분분하다. 넓은 세상에서 의견이 갈리고 관점의 충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의견이 나뉘고 뒤죽박죽 다툼을 벌여도 한 가지 면에서는 일치할 것이 있으니 자살은 미덕이 아니라는 사회적 컨센서스이다.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비록 자해행위라는 수단을 썼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되찾고 자기동일성을 지키려하는 눈물어린 충정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자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항룡(亢龍,가와바다 야스나리나 미시마 유끼오)들 같은 사람에게나 열려있는 것이지 우리 같은 토룡(무지렁이)들에게는 닫혀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탄생은 불교적 표현을 빌면, 맹구우목(盲龜遇木,눈먼 거북이가 백 만년에 고개를 내밀어 나무구명에 머리가 들어간다는 것)과 같으며, 태산이 백 번 융기하고 바다가 백 번 침강해 태어날 정도인 것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과정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분· 학식· 재산 등은 웃음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의 목숨이 모질기도 하고, 사람이 위대하고, 찬란하며 소중하고 아름다운 근거인 것이다. 우리가 순절·순교· 순국을 말하며 조선 여인. 이차돈과 김대건, 김상용과 민충정공을 기리는 것은 그것이 성대(盛代)가 아닌 난세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위로는 효도에 이르면서 자중자애하였으며, 고귀한 신분의 사람은 대역죄를 저질렀어도 목을 치지 않고 주검을 온전히 할 수 있도록 사약을 내린 것은 신체나 목숨의 훼손은 가당치 않다는 춘추의리의 발로였던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들의 조문시(弔文詩)인 만시(輓詩)를 통해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寄寶於他所(보물을 다른 곳에 맡겨 놓으면,) 取還不經夜(하룻밤도 안 되어서 되찾아간다.) 幸値主人忘(다행히 주인이 잊어버렸기 때문에) 五十三年借(오십 삼년동안 빌려 썼었다!). 이 만시는 이용휴(1708-1782)라는 문인이 유서오(1711-1763)라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목숨을 빌렸다()는 의식이다. 목숨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래전의 사람들은 했다는 것이다. 나의 목숨이나 재산 가족까지 위임 받았고 수탁 받았으며 대차했다는 것이다. 임차인은 주인을 대신하여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는지도 자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다시 청지기론으로 발전하고 빚진 자의 위치까지 올라간다. 빚진 자의 의식이라는 것은 따스한 햇볕에서 산들바람에서도 한 송이 들꽃에서도 한 바가지의 샘물에서도 은총을 깨닫고 은혜를 느끼는 사람이다.

 

자연채무라도 꼭 갚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나라 가족 사회 이웃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는데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시인 윤동주는 그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쉽게 씌어 진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다. 꼭 시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 쉬우면 어디 그게 인생이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임마뉴엘 칸트의 보상적 내세도 있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판이 오늘의 대안인 것이다. 고난의 찬미나 고통 속에서도 낙을 찾는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을 온몸으로 살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 승화원이나 연화장에 가면 빗물은 나의 눈물이요 바람은 나의 한숨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롭고 새털 같이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의 카타콤(지하묘지)이나 로마의 검투사를 떠올리면 생명이 밋밋하고 따분하다는 것은 불경(不敬)이 된다. 고승들의 좌탈입망(坐脫入亡,앉거나 서서 입적에 드는 것)이나 등신불 앞에 서면 이 삶이 헙수룩한 것이 아님을 떨면서 느끼게 된다.

 

2009년 유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