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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픔은 우리의 원형질이어라

무릉사람 2019. 4. 3. 20:47

먹고 번성하는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 원형질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애달픔이야말로 형이하학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것을 비집고 형이상학 쪽으로 머리를 들게 하는  역시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청마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나 노천명의 모가지가 긴 짐승에 대한 이해가 쉬울 수 있으며, 사람이 다른 동물과 줄을 그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세상이란 한계성과 인간이라는 유한성은 인간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슬픔을 가져다주었으며 人智가 발달하면서부터는 詩歌라는 쟝르를 통하여 그 비극성과 초월성을 나타내 보였다.

 

생명의 유한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찾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저 신선을 꿈꾸었던 소동파로 하여금 장강의 무한함을 부러워하고. 인생의 유한함을 슬퍼한다.는 탄식을 자아낸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것도 인류 최고의 지성이었던 동파거사가 그토록 눈물겹게 느낀 비애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애달픔의 바다에 빠져들게 한다. 아마 그는  美人도 한갓 흙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인류의 수모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날이 많았던 숱한 생명들을 생각하노라면 밤새워 울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파의 생명에 대한 애달픔은 백거이에 이르러 또 다른 나(자기)이면서도 영원한 대칭일 수밖에 없는 남녀간의 애달픔으로 이어진다. 그가 저 長恨歌에서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되자.는 다짐은 꼭 이융기나 양옥환만 지칭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저항시인 이상화가 情人 유보화가 일찍 죽자  이별이라는 시에서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는 절규는 상금도 서울 하늘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미라보 다리와 오작교. 이솔데와 도리스탄. 로미오와 쥬리엣, 女僧의 백석과 子夜 김영한은 사랑의 최고봉은 애달픔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루지 못하는 사랑도 야속하지만 그 사랑을 영원히 존속시키지 못할 때의 상심도 담고 있다고 볼 것이다.

 

이 애달픔은 사람으로 하여금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는 변증법의 포로임을 확인하는 데서도 시작된다. 하늘은 두 가지 재주를 주지 않으며. 확신을 가질 때가 가장 위험하고. 창업의 논리와 수성의 논리가 다른데서 우리는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마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 무엇이든지 찌를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를 생각하는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변형된 애달픔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삶의  희열과 삶의 고통은 같이 하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의 무게와 사랑의 괴로움의 무게는 같으며. 절망과 희망은 쌍태아인 것이다. 전체를 생각할 수 있으나 전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서도 우리는 애달픔인 것이다.

 

이 애달픔은 이 세상이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이라는 데서도 산견된다. 세상은 언제나 부정하고 불의하다는 것. 공의는 찾아보기 어렵고 곳곳에 차별이 있고 억압이 있다는 사실도 애달픔을 자아내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은 불온한 것이 내일은 정당한 것이 되는 것도 애달픈 것이고. 오늘은 빛나던 것이 내일은 천덕꾸러기로 변하는 것도 애달픈 것이다. 그리고 이 애달픔은 無常함에서도 몰려온다. 금란지교나 금석지맹도 언젠가는 깨지고 무너진다는 것. 우리는 5월의 신부가 영원히 5월의 신부로 남길 바라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 우리의 얼굴이나 우리의 마음도 변하고 산의 모양도 달라지고 강의 물줄기도 달라진다는 것. 낯익고. 익숙한 것에서 멀어지는 것에 우리는 애달파지는 것이다.

 

세상의 요행성도 우리를 애달프게 한다. 정의는 언제나 이겨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며. 강직한 사람이 추앙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치가 그 신념이 도전받고 훼손되는 시대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팥 난다.는 자명한 이치가 흔들릴 때, 우리의 사고 작용도 흔들리고 사람이 구차하게 되는 것도 애달픔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애달픔은 이백의 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심은 반드시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굳건한 믿음을 가졌으나 이 땅에는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는 불우하고 불운한 사람이 많다는 것에서 애달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게 애달픔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우리의 情調가 되고 情恨이 되었으며 情感이 되었다. 다시 천고의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애달픔의 원형은 오늘 우리가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08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