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만 충성한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버리자니 통합력은 인정받으나 권력 장악력은 떨어지고, 그를 안고 가자니 권력응집력은 공고해지나 숱한 외풍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자니 인사권자의 고민은 깊어지고 시름은 늘어만 간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거친 파도가 그치지 않는 북해(北海)의 왕자나 신파의 심순애나 오늘날의 청와대나 선택은 항상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명신(名臣)이라는 황희정승이나 범중엄 재상을 불러 의견을 내놔라 하면 아마 「대통령이시여,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보다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이번의 용산참사는 김석기라는 일개인의 진퇴문제를 떠나 이 정권의 성격이 규정되고 앞으로의 국정운영방향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김청장을 품고가면 강경파의 득세일 것이고 그를 하차시키면 온건파의 승리일 것이다.
용산참사는 그 정치적 의미 못지않게 법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공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공권력의 충성대상은 누구인가?」라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여 충성의 대상은 총구(銃口)가 아닌 국민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동법 제7조 1항에는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하고 있으며. 동법 제11조 2항에서는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라고 하여 역시 국민이 모든 공무원(경찰.군인.정무직 )의 충성의 대상임을 흔들림 없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충성의 대상은 때에 따라서 시대정신, 시대적 요청이나 대의라는 이름이 되기도 하고 특정 사람이 되기도 하며 한 나라나 신앙이 되기도 하고 오늘날 민주국가에서처럼 국민이 되기도 한다.
봉건제도아래에서는 영지를 하사한 영주가 기사들의 충성의 대상일 것이고. 봉토를 분봉한 왕이 제후들의 충성의 대상일 것이다. 조폭에게는 보스가 충성의 대상일 것이고. 회사원에게는 사주가 충성을 대상일 것이다. 어떤 때는 자기를 살펴준 백정의 딸이 교리 이장곤에게는 충성의 대상일 수가 있고. 볼품없는 자기를 알아준 과부 탁문군이 사마상여에게는 충성의 대상일 수도 있다. 조자룡이나 황충에게는 주군 유비가 충성의 대상일 것이고.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충성의 대상일 것이다. 성충이나 임수에게는 백제가, 기자나 비간에게는 은나라가, 문천상에게는 송나라가, 정몽주와 원천석.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3학사 최익현 황현에게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충성의 대상인 것이다. 신채호나 박열열사에게는 민족이 충성의 대상이었고 이차돈이나 김대건에게는 신앙이 충성의 대상이며 주자나 왕수인, 다석 유영모에게는 진리가 충성의 대상이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나 추근에게는 혁명이 충성의 대상이었다.
지난 대선전에 각 당의 전대에서 석패한 박근혜의 표가 이명박에게로 간 것이나 손학규의 정동영에 대한 것도 지지자보다는 당에 충성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고. 고선지장군이 서역평정에 나선 것은 망국의 백성으로서 자기실현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역사상에 가장 드라마틱한 충성의 표본은 「그리운 제상」 위징인데, 그는 일찍이 태자 이건성에게 이세민의 야욕을 말하고 선수를 쳐서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채택되지 않고 급기야는 이건성이 현무문의 변에서 죽자 천하의 안정을 위하여 원수 이세민에게 협력하고, 왕조의 번영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노린 위징을 받아드리는 당태종의 도량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참 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이종찬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계엄군의 차출을 거부한 것이나.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 때 「아무런 혐의가 없으며 양심상 기소할 수 없다.」며 이용훈외 3명의 검사가 사표를 낸 것을 보면 결국 공무원 자신의 소신과 용기의 문제로 귀결됨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미리 알아서 상급자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기 위하여 기는 경우나 기계적으로 공무를 집행하는 로봇 같은 경우는 운위되거나 논의되기에도 부적절한 국가경영보다 먼저 인간경영을 해야 할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공무원들에게 국민이 충성의 대상이라는 것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실제적으로는 피지휘자에게는 지휘자가 임용자에게는 임명권자가 충성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는데 있다. 우리나라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령에 국가의 통일성 안정성 일관성 지속성을 위하여 상부의 지휘감독권을 준 것이지 어느 일개인을 위하여 권한을 준 것은 아니다. 특히 악법과 부당한 명령에는 형식적 법치주의가 포함할 수 없는 명령불복종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의 학계 통설이다, 실정법이 자연법에 어긋날 때에도 자연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 대세이며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도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고 하여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권은 국민의 폭정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상급공무원의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대한 하급공무원의 항거권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낡은 이론이지만 아무리 특별권력관계를 인정하고 상명하복이 공무원세계의 근간이라 하더라도 법령이나 내규 준칙을 위반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세계인권선언에 담겨진 것들을 훼손하는 일체의 지시 명령. 지휘는 지령자와 수령자 모두 엄중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볼 것이다.
오늘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의식의 빈약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공무원들의 「관료의식」에 국민들이 실망하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분리통치와 대결의 조장을 통해 국민을 졸(卒)로 보는 이념가들 대신 각 부문의 테크놀로지와 정치의 테크니션들이 중용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특정집단의 나라도 아니고, 특정인이나 특정 정당이 없어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어느 당 어느 누구를 대치해도 될 만큼 내적 성숙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가치의 집단이자 그 모형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유 평등 창의 복지 공존 다양성 봉사 인명존중 같은 제 가치들이 다 녹아있고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의 권부가 옛날 도방이나 정방이 아니고 번진이나 군벌이 아닌 이상 임면권자보다는 국민을 바라보고 대한민국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충성의 대상은 특정인이나 특정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임이 확연해 지는 것이다. 인연(발탁 등)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겠지만 궁극적인 헌신과 봉사의 대상은 역시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 모두 생각과 처지는 다르지만 우리의 가치나 지향은 대한민국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굳이 법령에 명기되거나 훈령으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당연한 것은 표현하지 않는 법이다. 누구나 공무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무원의 복무규정으로는 미칠 수 없고 법령의 해석으로는 어림없는 모든 것의 지도원리인 휴머니즘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 고위 공무원일수록(선출직 임명직 막론하고) 이름을 중히 여기고 명예를 소중히 하며 명예를 먹고 살아야 한다. 정의가 못하는 것을 긍휼과 연민은 이룰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아무리 경륜이 높다하다 해도 인간애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더욱 많은 도연명, 생육신, 죽림칄현이 이 나라의 공무원들 속에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거듭 살펴보지만 우리의 공직자들이 마지막까지 충성할 것은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긴 글인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9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