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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변하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

무릉사람 2019. 4. 4. 21:04

나는 어렸을 적에 교회 건물을 보면 뭔가 감히 범하기 어려운 기운을 느꼈으며. 교회의 뾰족한 탑은 에머랄드 빛 하늘과 더불어 나의 작은 가슴을 뛰게 하면서 종교적 상상력을 한껏 부풀리게 했다. 어른 된 지금은 그때의 느낌보다는 덜하나 아직도 신성한 곳. 회개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제단이라는 것은 부동(不動)의 인식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인간의 숭배대상이었던 달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그 정체가 밝혀져 토끼가 방아 찧는 곳이 아니라 한갓 불모의 위성(衛星)에 지나지 않아 인간에게 전설을 빼앗아 가고 낭만을 없앤 것처럼 교회도 이제는 무조건 숭배 받고 신비스러우며 무오류의 영역이 아니라 밖에 노출되며 유리알 같이 깨끗해야만 존립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나의 짝사랑하는 마음과는 달리 사회로부터 비난이 빗발치고 있으며 교회의 존재가치마저 의심받을 만큼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극한의 기복주의는 미신과 다를 바가 없으며 웅장한 교회당 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한다. 물질주의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라 돈 없는 사람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마치 바다 한 가운데의 외딴 섬처럼 사회와는 벽을 쌓고 고립을 즐기며 저 혼자의 고고함을 자랑한다. 예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공공연히 자행되어 이제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경멸까지 받고 있다. 이러다가 교회무용론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야소교(耶蘇敎)가 들어온 이래 야소교는 우리나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실학사상을 북돋우고 민권사상을 일깨었으며 교육과 의료부문에서는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가까이는 6.25동란의 참상과 폐허로부터 신음하던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다. 비록 미국의 구호물자의 성격이지만 거기서는 따뜻한 강냉이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며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어려움을 나누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모든 것이 사꾸라짜가인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굳건히 심어주었다. 그해서 나의 어머님은 내가 중학교에 바로 진학을 못하자 교회라도 다녀라.고 하셨는데 이는 교회가 당시 정부의 역할까지 담당하였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과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라의 발전과 민중의 교화에 이바지한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변질되고 사람들과 유리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요. 하나님이 몸이며 환난으로부터의 산성(山城)이요.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 신앙을 돈독히 하고 말씀에 힘입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의 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는 곳인 교회가 이제는 자칫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 존경의 대상도 아니며 한 번 가보고 싶은 곳도 아니고 사람들을 위무하고 구휼하는 곳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발전에 거치적거려 사람들의 우려를 받는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전에는 선진(先進)을 드높였는데 이제는 가장 후진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낀다. 행정관청처럼 교회의 문턱이 높다. 생활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교인이 말만 번지르한 부실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같은 교회의 교인들 간에도 그 직업이나 재산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고 밖에서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고 교회 안에서만 교인이 된다. 또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목사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잊어버린 체 교인들을 가부장적 자세로 다스리고 그들 위에 군림한다. 한 때는 이 민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던 이 교회가 오늘날에는 옛 왕궁의 깨어진 유물의 신세가 되었다면 병이 들어도 깊은 병이고 문제도 아주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교회가 본연의 구실을 못하면 다른 대안이 나오고 주체가 바뀐다.는 것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가 정체를 하고 알력을 겪을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것은 성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더욱이 교회에는 세속을 초월하는 규범이 있는데 세속과 타협하거나 타락상을 보일 때 그 교회의 수명도 다 하는 것이다. 교회도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고 역사는 그 중심축의 교체라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것이 불편한 것이든 편견이든 기존의 것을 따르려고 하나 이것이 굳어서 관습, 제도, 규격화로 자리 잡으면 일탈을 생각하고 극복을 생각한다. 마틴 루터나 칼 빈의 프로테스턴트(異議者)가 구교에 대항할 때 그것은 반란이었고 실험이었다.

 

그것은 진통의 시작이었으며 새로운 도약이자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1200년간이나 인간의 의식과 규범을 지배해온 구교의 맹점과 결함을 알았던 것이다. 교회나 교인이 세상 사람들의 우려의 대상이 되고 새로운 분발을 촉구한다면 지금의 시점이 제2의 종교개혁의 때일 수도 있다. 폐쇄적이고 아집적이며 거대해서- 옛날 공룡들처럼 제풀에 사라지기 전에- 다른 우수한 종교에 떼밀려지기 전에 탈바꿈을 할 때가 오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회의 예배의식이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 믿은 것이 아니라 봄에는 봄의 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의 꽃이 피어야 제격인 것처럼 여태까지 교회를 이끌어온 성장제일주의나 물질주의 등의 지도이념은 이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도 mind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목적이 이익의 극대화라면 교회의 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섬김과 나눔의 극대화인 것이다. 교회야말로 섬김과 나눔의 마음 없이는 생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가 서양의 교회처럼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도 내적 성찰에 힘쓰며 교회와 사회와의 접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의 양적 팽창이나 확대에서 비켜서서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하며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이 잣대로 보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데 있다. 지금까지 교회의 뭇 제도나 의식 행정을 바꿔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꼭 비싼 비품을 구입해야 하는지 헌금을 강제징수식의 현행방법으로 꼭 거둬야 하는지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지 지금까지 무심코 따르고 편의주의적인 것들을 고칠 법도 한 것이다.

 

선배들이 했다고 해서, 100년 전통이라 해서 도식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간편과 검소와 진정(眞情)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교회의 세금과 성직의 세습에 대해서도 아전인수식이나 견강부회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설령 교회에 불리하더라도 -교회의 불리와 하나님의 불리는 일치하지 않는다.-기꺼이 채택하는 용기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못 해석된 성경의 문구들을 바로 잡고 종교 감정에 어긋나는 것들이 있다면 이의 불식에도 꾸준히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석(多夕)선생의 언급처럼교인들을 말씀으로 감동 시키되 지금처럼 계속 품안의 자식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광야로 독립해서 돌려보내는 어른스러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은 가치중립적이지만 이렇게 교회에 대해 정을 쏟고 애착을 갖으며 잘 되길 바라는 것은 내 젊은 날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이 시각에도 새벽기도에 참례하면서 평생을 하나님을 사모하며 몸 바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믿음과 정성이 헛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쓰고 2008129  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