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있고. 조국은 없다
「관부연락선」,「지리산」의 작가 이병주는「조국은 없다. 산하만 있을 뿐이다.」라는 칼럼을 썼다가 군사정부에 의해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의 감방생활을 한다. 이병주평전을 쓴 어느 문인은「이병주의 이 산천에 비하면, 민족주의. 사회주의. 친일파. 독립운동. 또는 무슨 평화주의가 얼마나 초라한가. 그렇다면 산천은 무엇인가. 생명사상이 아닌가.」라면서 이병주의 역사인식과 국가관이 범상치 않음을 설명한다.
춘원(春園)은 그의 대표소설「유정」에서 최석이 하르빈에서 만나는 옛친구의 입을 통해 그의 조국관을 개진한다.「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고국에 무슨 그리운 것이 있단 말인가. 그 벌레 들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 물보다도 모래가 많은 다 늙어빠진 개천이 그립다 말인가.
그 무기력하고, 가난하며, 시기심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문학이 있단 말인가. 사상이 있단 말인가. 사모할만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날더러 고국의 무엇을 그리워하란 말인가. 나는 조국이 없는 사람일세.」라는 말에서 우리는 춘원의 내면의식을 읽을 수 있고. 그의 생각의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
분명히 이병주와 춘원은 임진왜란 때 왕이 북쪽으로 달아나고. 6·25사변 때는 대통령이 남쪽으로 달아난 것을 몰랐을 리 없고.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강점기 전 1900년을 전후하여 박용철이 그의 시「떠나가는 배」에서「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며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서(男負女戴)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거나 또는 김동환이 그의 시「국경의 밤」에서「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하며 마음 조리는 아낙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병주와 춘원은 백성의 생활이 곤궁할 뿐만 아니라 정신도 곤궁한 나라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고. 포용과 관용이 메마르며.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나라는 나라가 아니며,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반대하지 않고. 권력이 폄손하지 않으며, 대통령이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도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이병주와 춘원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시사(詩史)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춘망(春望)」에 나오는「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은 있어(國破山河在)」를 완전히 이해했고. 맹자의「사직의 가벼움과 백성의 무거움」도 충분히 숙지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시점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임을 그려보였다고 할 수 있다.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나라란 단지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고. 산천만을 나라로 알고 있다고 볼 때,「허망한 정열」로 가득 찬 나라보다는 천고의 세월을 지켜온 산천이야말로 진정한 나라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있다. 나라란 것이「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한 꽃 대궐」이면서 시스템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을 때만이 정녕 나라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병주와 춘원이 그려본 나라는 우리가 끝내는 가야할 나라이고, 만들어야 할 나라인 것이다. 과연 이병주와 춘원이 본 나라와 지금의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한가? 과연 지금의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나라인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나라가 아니라면 우리의 나라는 이「산천」뿐일 것이다.
2014 08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