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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을 위하여

무릉사람 2019. 4. 6. 15:37

어렸을 적 나는 시골에서 동네의 교회를 보면 무언가 범하기 어려운 기색을 봤었고, 그림을 통해서 서양의 중세 고딕식 교회건물의 첨탑을 보고서는 세상을 벗어나 하늘에 닿기 위한  인간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른 된 지금은 그 분은 어디서나 임재 한다고 생각하여 장소나 형체에 대한 외경감은 그때보다는 덜하다. 그것은 옛날부터 인간의 숭배대상이었던 달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그 정체가 밝혀져 -토끼가 방아를 찧는 곳이 아니라 한갓 불모 의 위성 -인간에게 전설을 빼앗아 가고 낭만을 없앤 것처럼 교회도 이제는 두껍고 짙었던 장막 밖으로 나오고 무오류의 영역이 아님에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동안 한국역사에 만만치 않은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영향력이 예전보다 못한 것은 다른 종교의 상대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고 공로가 깎이는 것은 세상과 완전 절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극도의 기복주의는 미신과 다를 바 없고, 웅장한 교회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은 건축사나 미술사에 남기 위한 것 같다. 특히 물질주의에 경고하고 이의를 달기도 하여 세속기관들과의 차별화도 더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의 외딴 섬처럼 사회와는 괴리된 채 저 혼자의 고립을 즐기며, 시중의 충언과 간언에도 난공불락의 성 같음을 오히려 자랑한다. 이러니 안으로는 자조를 띠며 밖으로부터는 경멸을 받는다. 이전의 역동적인 교회와 대비되어 교회무용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조선조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실학사상을 북돋우며 민권사상을 일깨우고 교육과 의료부문에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가까이는 6.25의 참상과 폐허로부터 신음하던 사람들의 방주요 산성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미국 구호물자의 형태이지만 거기서는 따뜻한 강냉이 죽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고 .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어려움을 나누며, 하늘로부터는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도 있었다. 또 모든 것이 사꾸라와 짜가인 세상에서 그래도 교회는 진정성과 진실성이 있다고 사람들이 굳건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님은 내가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바로 진학을 못하자 교회라도 다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의 교회들이 공적인 부조와 사회적 인프라로써 정부의 역할까지 담당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그리스도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라의 발전과 민중의 교화와 구휼에 이바지한 찬란한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과 영적인 것만을 꼭 붙들고 가야할 교회가 세속을 닮아 교회가 변질되고 사람들과 유리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되고 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야 하며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성경의 말씀을 이 땅에 구현하는 전달자로서의 교회가 이제 시험대에 오르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들의 집회소도 아니며 사람들이 위무를 받는 안식처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가장 낙후된 단체에 속하고 국가를 곤경에 빠뜨리며, 뜻 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받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신분의 벽은 교회에서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자리 잡는다.  이제는 행정관청보다 교회의 문턱이 높다고 한다. 장융의 「대륙의 딸」을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이만 오히려 휴머니스트에 가까워 나의 찬탄을 받았다. 그런데 솔선해야할 사람들이 말만 번지르한 부실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당동벌이(黨同伐異)가 세상 사람들의 처세라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처세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교인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은 잊어버린 채  가장 가부장적으로 생활을 하며 대우 받기를 요구한다. 한 때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대상이었던 교회가 오늘날에는 탄식의 대상으로 바뀌고 옛 왕궁처럼 형해화 된다면 병이 들어도 깊은 병이고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근심스러운 일인 것이다.


교회가 그 본연의 구실인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면 다른 대안이 나오며 사울에서 다윗으로 기름부음이 변경된 것처럼 주객의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바빌로니아로 유폐되어 그 뒤 이리저리 유랑하는 「디아스포라」의 신세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정체(停滯)를 하고 하나님의 기대를 배반할 때 하나님은 교회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사실을 성서를  통해 보여주신다. 교회에도 종교적 시스템으로써의 내적규제가 있고, 예수님 삶 자체가 문자(文字)나 전언(傳言)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 못하고 장애가 될 때 그 교회의 수명도 다 하는 것이다. 교회도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으니 자연 도태가 뉴스거리가 아니며 역사의 중심축의 몰락이라는 수모도 따라올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 무엇이 불편한 것이든 편견이든 기존의 것을 따르기 때문에 이것이 굳어져서 관습 제도 문화로 자리 잡으면 아무리 새롭고 좋은 것이 나와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마틴 루터나 칼 빈의 프로테스탄트(이의자)가 구교에 대항할 때 그것은 반란이었고 실험이었다. 그것은 진통의 시작이었으며 새로운 도약이었으며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그제 서야 1200년간이나 인간의 의식과 규범을 지배해온 구교의 맹점과 비위를 알았던 것이다. 교회나 교인이 세상 사람들의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자성을 촉구하는 소리가 커진다면, 어쩌면  지금의 시점이 제 2의 종교개혁의 때일 수 있다. 오늘같이 폐쇄적이어서 비밀결사 같고 아집적이어서 옹고집을 떠올리게 한다면 거대해서 중생대 말에 공룡들이 멸종한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다른 우수한 종교에 능가 당하거나 떼밀리기 전의 경고음이고 방어본능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회의 주관심이 존재를 부각시키며 성장 지향이라면  지금부터는 내면의 강화와 내적 성실에 치중해야 할 때인 것이다.


물질주의와 성장주의, 공격성과 전투성은 이제 낡은 지도이념으로 치부하고 마인드와 정신이 중심에 있어야 하며, 섬김과 나눔이라는 영원한 덕목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나라 교회들이 서양의 교회들처럼 노후화(?)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팽창이나 확대에서 물러서서 겸손하고 온유한 교회 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교회의 뭇 제도나 의식 행정을 바꿔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꼭 비싼 비품을 구입해야 하는지 헌금을 강제징수식의 현행방법으로 꼭 거두어야 하는지 십일조나 헌금 등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꼭 밝혀야 하는지도 공론에 붙여보고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말씀보다 바울의 말로 더 이루어졌고 목사는 판사도 그렇지만 인생의 이력이 40은 넘어야 될 수 있게 하는 등의 그동안 오만과 편견은 없었는지도 뒤돌아 볼일이다.


지금까지 무심코 따르고 편의주의적인 것들은 고쳐져도 되는 것이다. 선배들이 했다고 해서 또는 100년 전통이라 해서 도식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간편과 자유의 측면에서 예배의 진정성과 신령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생각해 볼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성서의 해석도 아전인수식이니 견강부회할 것이 아니고, 생각의 상한과 하한을 넓혀서  설사 그 내용이 교회에 불리하더라도 -교회의 불리와 하나님의 불리는 일치하지 않는다-기꺼이 채택하는 용기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이나 계도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의 폐기,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관용도 이제는 심각하게 생각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교회에 대한 정을 쏟고 애착을 갖는 것은 아직도 한국교회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국의 정신계의 큰 봉우리로 남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내 어렸을 때와 젊은 날 정열을 불태웠고 내 지평을 열어준 공신이기 때문이며, 그동안 회의하고 회의하여 고운정 미운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재남님과 배동영님처럼 지금 이 시각에도 평생을 하나님을 사모하며 몸 바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믿음과 노력이 헛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알 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포악한 무슬림들조차 종교를 갖지 않으면 영성이 없는 짐승으로 취급하리만큼 종교성이야말로 인간의 기품과 연결되는 것이다. 의인이 열 사람만 있어도 소돔은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도 새벽기도회에서 마음을 고백하는 이 땅의 기도하는 어머니들로부터 그 구원의 역사를 그려본다.

끝으로  아프간에 인질로 잡혀있는 우리의 국민들의 무사 귀환과 이미 고인이 된 두 분의 명복을 빈다.


2007년 8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