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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학(好學)은 나의 운명이다

무릉사람 2019. 4. 7. 23:24

논어 제 6편을 보면  공자는「오직 안회(顔回)만이 학문을 좋아하고 화풀이를 하지 않으며 똑같은 과오를 두 번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회 말고는 지금까지 그런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공자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찬사를 받고 알아준 것도 스승 공자였으니 안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꿈의 사나이였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고 지향하는 바가 있다. 이 꿈이야말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그 사이 역할도 한다.「실현 가능성 있는 꿈」이나 「기회의 도래 가능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참게하고 힘든 일을 참게 한다. 또한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으로써 면모를 일신케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끔 한다.


나도 젊었을 적 돈 권력 지위 명성 지식 미녀 등을 가치적인 것이라 보고 이를 탐하며 추구했었다. 남에게 빼앗길까봐 남에게 뒤질세라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괴롭혔지만 능력이 부족했고 노력이 모자랐으며 부덕하고 박복하여 공명을 다툼은 이제 옛일이 되고 부귀를 누림은 내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으나 도로(徒勞)였고 분망했으나 번거롭기만 하였다.


셀리(Shelley)의 비탄과 베를레에느(Verlaine)의 비애나 두보(杜甫)의 탄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천하 모든 것은 다 임자가 있으며 세상에는 시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것은 늦은 깨달음이다. 위 논어 제6편이 시의에 맞춰「 야구선수가 홈런을 칠 때 공이 크게 보였다」고 한 것처럼 크게 다가오고. 「쇠절구보다 바늘이 더 날카롭다」는 것처럼 몇 마디의 말이 내 두꺼운 중년(中年)을 찌르는 이유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만나거나 갈라지건만 허락된 것은 외면했고 금기시 된 것은 좇았으니 한유(韓愈)의 「비록 천리마하나 먹는 것이 모자라 그 재주가 바깥에 드러나지도 못하고」는 과신(過信)이 되고, 도연명(陶淵明)의 「고향 전원이 황폐해 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는 지적 유희였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들은 「책벌레」라는 소리만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나의 도구가 되어서 내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다.


그동안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고 말 못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관성 있게 겨우 하나 지켜온 자세는 독서였으니 한우충동(汗牛充棟)이 부럽지 않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호학(好學)과 애지(愛知)는 내가 숨거나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며 내가 인생의 마지막 날에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지성과 교양과 정신은 이 또한 내가 마지막까지 꼭 붙들어야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탈출했으나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맨 것이나 손오공이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은 부처님의 경계 안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에서 호학은 천성이자 성품임을 확인하게 되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기 위해서도 수많은 간난과 인고가 필요하듯  모다 호학하는 마음을 굳건히 지켜나가라고 밑거름을 주며 격문(檄文)으로서 장정(長征)을 비는 것이라 자의적인 해석도 해본다.


나는 아직 다행히 몸은 건장하여 옛날 수도승이니 스님들처럼 몸소 경작할 수 있고 소출을 기뻐하니 외압을 받을 일이 없고. 안회도 한 주먹의 밥과 한 모금의 물에 만족하고 누항(陋巷)에 거처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나의 완고한 후원자인 것이다. 「아는 것이 즐기는 것보다 못하고, 행함이 따라야만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말은 내게 주저함을 없애주고 호학하는 마음이 상상력을 크게 하는 것이라면 한 번 크게 욕심 낼만 한 것이다.


거기에다 학문에 있어서는 나이가 장애가 되지 않고 무르익은 지력이 장점이 되며 학문의 결과인 화를 다른데 옮기지 않으며(不怒遷)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다면(不貳過) 이것만 가지고도 인생은 근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고 세상 사람들과 반대편에 앉으며 세상 사람들과 쓰는 말을 달리 한다는 것도 다양한 세상에 다채로움을 보태는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한다.


안회는 31세에 아깝게도 세상을 마쳤다. 그래서 더욱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내 나이 50하고도 중반, 비록 성상(星霜)은 다르지만 안회가 지향하고 안회가 꿈꾸었던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흉내를 내본다면 나는 이 시대의 지진아(遲進兒)일 수도 있고 이단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이 진창 같지만 안회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만 있다면 「꿈꾸는 자는 복된 자」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2007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