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치창조적인 사람들의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복권을 사고 경마를 하고 카지노에 용감한 사람들이라도 새로운 것- 그것이 여행이든 창업이든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 을 할 때에 마음 설레고 가슴이 부푸는 사람보다는 불안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로 보기보다는 기존의 것이 조악(粗惡)하고 유치(幼稚)하고 불편해도 그동안 눈과 손에 익숙했기 때문이요 세월이 가면 무쇠 같은 것도 친근감으로 변하기 때문이며, 무의식적으로 미지의 것에 대한 방어본능이 발동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의 행위는 돌출적인 것은 적고 연속성을 띄어서 편리하든 불편하든 일정한 추세를 형성한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관행이 되어 관성화 하는데 관성은 배의 키나 자동차의 운전대를 어느 한쪽으로 고정시켜 둔 것 같아 관성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힘들고 어려워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대항을 일으키게 한다. 사람은 어느 동물보다도 이해타산에 밝아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할 때 재빨리 손익득실을 헤아린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나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어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외에는 「지금 있는 것, 가진 것, 누리는 것」-설령 그것이 소털 같이 하찮은 것이라도- 을 잃지나 않을까를 먼저 염려한 다음에야 다른 얻을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생소함은 우리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위축시키지만 막상 미래를 현실화 해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처음의 긴장이나 조심스러움은 사라지고 통상적인 것으로 수렴되어서 다시 타성에 젖고 관성으로 굳어진다. 개혁이 기득권화하여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나는 우리가 장차 하고자 하는 일들이 우리의 신념이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지만 제비뽑기나 구슬 굴리기처럼 우연(偶然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두고 최선의 결정도 최악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새것과 미지의 것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도 자신만만할수록 자칫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굳건한 신뢰성은 드물고 사람이 손대는 것마다 진실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많기 때문에 지지 받고 보존되는 것이 별로 없다면 오지 않은 미래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의 이 상태도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이 자기의 최선이고 최고의 상태라고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오늘은 계속 내일에 의해서 부정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만약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했거나 변화에 겁먹고 도전에 움찔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혜택이나 광범위한 기술의 발전은 아예 생성되지 않았거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상으로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들- 아주 잘 알며 치밀하게 준비한 것- 이 실패하고 무산되기도 하는데 비하여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고 절반 만 성공해도 다행이라 여기는 일들이 예상외로 대히트를 치거나 대성공을 하기도 한다. 생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처음 의도한 것과는 반대의 효과가 발생되며, 천 가지 대비를 했으나 한 가지 소홀로 십년 공력이 水泡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미미하고 소소해서 세상을 안다 해도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이며 더군다나 대비하고 예측함은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래의 일, 미래의 일, 새로운 일에 대해서 好, 不好를 표시하거나 너무 앞질러서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히려 인생을 찬찬히 뜯어보면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음을 흔히 볼 수 있다. 복이 바뀌어 화가 되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여 인간의 계산이나 전망이라는 자체가 무의미하며, 요량이나 계량이 안 되어 제 꾀에 제가 넘어가거나 우주에 바람 한 점 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구태나 구습과 결별 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마뜩찮은 현실을 박차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할 때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결정이 최상의 결정이기를 기원하면서 운명의 여신이 나의 손을 들어주기만을 고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역사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써지고 경영 되었지만 거기에는 무수한 희생과 시행착오가 곁들여졌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다 내일의 보장이 없고 내일조차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또 「소뿔 고치려다 소를 죽일 수도 있는」 우를 범할 수 있으며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는」 치졸(稚拙)함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담구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이고, 세상에는 때로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의 흔들림보다는 저돌적으로 감행하는 것이 승기를 잡을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가치창조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 5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