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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핑계인가, 치유인가

무릉사람 2019. 4. 9. 19:18

합리화의 사전적 의미는「잘못된 견해나 행동이 그럴듯한 이유로 정당화되는 것」또는「이치나 논리에 맞게 됨」 이라고 나와 있다. 또 철학적으로는「사건이나 행동을 기존의 다른 부문과 연결시켜 수용할만한 논리를 찾음. 또는 그런 태도」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에서 가장 합리화를 잘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고, 소진과 장의였다..


그렇다면 합리화에 강하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논리학이나 수사학에 밝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요리조리 둘러만 댄다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나는 상황에 따라 모든 논리가 달라지는 상대주의적 철학관을 가진 사람도 아니요. 변명만 늘어놓거나 견강부회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나야말로 나무의 결 따라 도끼질을 하는 것처럼, 물이 앞을 다투지 않는 것처럼 무리나 억지를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도금(鍍金)한 것을 금이라 우기거나 무덤에 회칠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야말로 고깝거나 언짢아도 일관성을 유지하려하고, 인생이 난파당하는 상황에서도 동일성을 견지하려 한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완벽하지는 못해도 다 일리가 있고, 독특함이  있다고 본다. 창과 방패도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굼벵이의 뒹구는 재주나 밟으면 꿈틀대는 지렁이의 자존심에도 고유한 뜻이 있으며, 견명구도(鷄鳴狗盜)의 재주도 요긴한 것이다. 다 자기 말을 하고 싶어 하고, 다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춘수가 「꽃」에게 한 것처럼 모든 것에 이름을 주고, 의미를 붙이고, 정체성을 부여 하는 것이 강변(强辯)이나 사언(詐言)이 아닌 것은 그것이 존재방식과 존재양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과 내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보는 관점의 차이로 본질은 같은 것이다.


사실 이 합리화란 것은 자신과 연결될 때, 존엄한 내가 우습거나 가볍게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요. 내가 있는 곳마다 꽃자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미천한 곳에 놓이더라도 좌절하거나 천박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맹호연(孟浩然)의 시 「춘효(春曉)」의 「지난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꽃잎은 그 얼마인가.」에서 맹호연과 봄의 애상을 같이 하며, 유라이어 힙의 노래 「7월의 아침(july morning)」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영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고 종달새 마구 지저대는 7월의 아침이 그래도 즐거울 수가 있다고 느끼는 것도  합리화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양지든 음지든 상관하지 않으며, 명성을 도둑질 하지 않겠다는 것. 내가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어찌할 수없는 상황에서도 인용을 할 것이고, 수용하겠다는 것. 이도 눈물이 날 정도로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겠다는 나만의 합리화인 것이다.


이것은 또 이왕 사는 삶이라면 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아니라 쟁기를 끄는 소로 살겠다는 것이고, 상황이 곤란해도 주위환경을 유리하게 들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는다는 옛말을 따르겠다는 것이요.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에서는 자칭타칭 현자들이 많은데, 거지가 적선을 하는 사람에게「나는 당신의 악업을 씻어주기 위해서 자비로 포장된 동냥을 받으니 고마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라는 말을 언어도단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말이 참일 수도 있다고 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듯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그들의 어록에서 종교의 달인(達人)이랄까 합리화의 명인(名人)을 엿볼 수 있다. 아랍사람들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이 「할라스」이다. 즉 알라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할라스요, 빼앗고 빼앗기는 것도 할라스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이런들 흥~ 저런들 흥~ 으로서 각각은 그 고유한 뜻이 있고 그것 모두 알라가 정한 것이란다. 그래서 여기 무슬림의 세계에서도 합리화의 계보들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인도나 아랍 두 곳 다 넓은 땅 거친 사막이 있고 종교의 발생지이고 사람들이 낙천적이며 신실하고 지성의 요람이고 영성의 고향이다.


놀랍게도 열악한 자연환경이 오히려 정신의 최고 형태를 이룩하고 그것의 진수가 바로 합리화임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내게 있어 합리화란 주위여건을 이용하고 더 나은 방향에로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합리성의 적수(敵手)라는 허무감을 배경으로 하고 허망함을 저변으로 하는 낭만주의(浪漫主義)란 병이 도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되도 하늘의 뜻, 안 되도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가장 큰 합리화라면 그 밖의 합리화란 것은 작은 합리화인 것이다. 합리화는 그가 처음 생각을 했든 못했든 이제 위로와 치유의 능력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치기까지 나는 많은 길을 우회하였고, 아직도 대도(大道)에 올라서지 못했다.


2007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