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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동혈(偕老同穴)은 옛날 일인가?|

무릉사람 2019. 4. 9. 22:39

어젯밤 안해가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를 더 먹으면 각자 혼자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고 덧붙였다. 「넌지시」란 형태를 띠었지만 듣는 나는 황당했고 난감했다. 그동안 「아이 셋 결혼시키면 두 내외만 오붓하게 살아보자」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변한 것인가? 내 마음을 떠보는 것인가?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우리가 어떤 부부인가? 패기 넘치던 젊은 날 「아 鳳은 언제 凰을 만나나.」란 제목의 글을 써서 안해에게 읽어주고 기어코 선택한 사람이었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나를 만나서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理想的인 것이 異常한 나라에서 나를 만나 고초도 많이 겪은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감복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근자까지「아내자랑은 팔불출」이라 하지만 나로 하여금 기꺼이 팔불출이 되게 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떳떳하게 「나는 내 아내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한 그 사람이었다.


성질 급하고 모난 나를 다듬고 제어한 나의 策士 장자방(張子房)이었으며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한 사마리안인 같은 사람이었다. 몇 해 전에 그 졸업하기 어렵다는 방송통신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사이버 강의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학구파이다. 그런데 오늘 나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이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대경실색  했을 것이며. 노발대발할 수도 있고. 분기탱천할 법도 했겠지만


금홍이(이상의 逢別記)와도 사는 남자도 있는데 나는 다소곳하였고 계면쩍었다.

그리고 곧 안해에 대해서 측은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동안 얼마나 이 말을 하고 싶었을까. 一夫從事와 一片丹心으로 무장한 조선의 여인 같은 사람이 이 말을 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내면적 고뇌는 어떠했을까. 나는 그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드리웠던 장막이 찢어지며 무대의 안쪽을 볼 수 있었고 , 나는 오늘 心腹 중의 심복으로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腹心을 들은 것이다.


나는 안해의 말에서 「吾等으로-」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50세의 한 여인의 자주적이고 자결주의적인 인간독립선언문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그것은 5000년 동안 이 땅에서 학대받고 무시 받던 여인들의 미더운 반란이었던 것이다. 부부는 닮는다 하지만 안해도 나와 같이 정신의 독립, 사유의 無碍를 꿈꾸었던 것이다.

 

-옛날 자유연애의 첫 주자 卓文君이 司馬相如를 따라나선 것처럼 그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나만을 믿고  나만을 따라선 그녀이다. 시집 식구 전부가 아껴주어도 남편이홀대하는 것은 싫으며, 시집식구들이 전부 박대해도 남편만 알아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던 그녀였던 것이다. 내가 외국생활을 할 때 어머님과 밭일을 다니면서도 힘들다는 소리를 안했고, 내가 귀국하여 큰아이를 배었을 때 명태를 할복하다 가시에 찔려 생손을 한 달 동안 앓았어도 약을 안 먹고 고통을 버텨내던 그녀였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동안 그녀의 진심과 진정을 모르고 외면했던 나는 이윽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금도 분명히 단언하고 확언하건대, 내 안해는 저 詩經에 처음 나오는 말 '요조숙녀(窈窕淑女)' 딱 그대로이다. 현숙하기로는 남자의 자존심을 세울 줄 알고 정숙하기로는 지아비만을 하늘로 여긴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을 가진 고전적 여성상에 자기의 소질을 계발하고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맹렬정신을 가진 현대적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는 곳은 아름다운 화초로 가득 찬 듯 화기애애하고, 그녀가 머무는 곳은
향을 싼 종이에서 향냄새가 나는 것처럼 단아함이 있다. 마음이 어질고 넉넉해서 「慈愛란 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알게 하고, 성격은 반듯해서 송백도 그 기품을 다투어 칭송할 만하다. 그러고도,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남자를 만난 것에 대해 싫은 기색도 안 짓고 귀찮은 소리 한 마디 안하면서, 언제 될지도 모르는 남편의 성공만을 바라며


묵묵히 살아온 것이다. 어찌 감정이 없을 것이며, 어찌 중심이 없다고 볼 것인가.
남도 땅 벌교에서 만나 어언 30 개 星霜, 오늘까지 고락을 같이하며 나를 지켜준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봤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봤고 사람들은 나를 믿기가 어려웠겠지만 그녀는 나를 믿어줬다. 하늘아래 몸 둘 곳 없는 나를 '熱血男兒'로 대우해 주었고 知音으로써 나를 인정해 주었건만, 나는 아직 그 보답을 10분의 1도 못하였다.

 

내가 이 사람을 살펴서 아내로 삼은 것은 -그녀가 내 기상과 포부를 본 것처럼-그녀의 천성과 인품이 훌륭했기 때문이고, 자질과 덕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며 인정도 많고 자상하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때 원효대사(元曉大師)에게 요석공주 같은, 박열(朴烈) 열사에게 가네꼬 후미꼬(金子文子)같은 여자를 그려보았다.


 나는 이 사람이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라!」 「흙속에 묻힌 진주라!」 여겼다. 그래서 「군자가 군자를 알아보는 마음으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갈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정숙한 아가씨는 君子의 좋은 짝」이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나의 배필로 삼았다. 여느 결혼들처럼 친정배필이요 만날 수밖에 없었고 결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처음 뜻이 고상했고 고귀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어렵다고 힘들다고 뜻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큰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는 하늘이 내게 어진 아내를 주고 좋은 안해를 주었음에도 눈멀고 귀가 멀어 알지를 못했고, 고마워 할 줄도 몰랐고, 이를 제대로 음미할 줄도 몰랐다. 근 25년을 한 지붕 밑에서 살았지만 건성으로 산 것 같고 뜨뜻미지근하게 산 것 같다. 헛살았다고는 못하지만 헛살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불경에 「한 이불 밑에서 살을 맞대고 환호작약한들 마음의 교감이 없으면 천리밖에 있는 거와 같고 비록 천리밖에 있으나 마음이 일치되고 소통하면 옆에 있는 거와 같다」고 했는데, 이 사람과 내가 부부라 하나 계획이 다르고 한집에 사나 경영이 다르고 매일 얼굴을 보나 소원하다면, 다시금 간담을 열어서라도 비추어 진심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안다. 그녀가 나를 만나 낙랑공주(樂浪公主)처럼 친정을 뒤로했고, 평강공주(平康公主)처럼 지아비의 성공을 위해 애썼고 선화공주(善花公主)처럼 나만을 의지했음을.

나의 안해는 우리 어머니가 당신이 낳으신 아들인 나보다 더 신뢰하고 어머니의 정과 마음을 준 며느리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강원도 화포리(회진포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의  완순이 어머니, 종만이 어머니, 후암이 어머니, 내범이 어머니 등이 꼭 당신들의 며느리로 삼고자한 사람이었으며, 서울의 영주 어머니, 성철이 어머니 등이 극구 칭찬한 사람이었다. 다들 김아무개의 홍복이요 굴러들어온 복덩어리라 하여 내가 딴것은 몰라도 「처복은 하나 타고 났구나.」하고 우쭐대게 한 사람이다.


그 많고 많은 살아온 날들에서 둘이 한번 호젓이 외식한번 못하고 정답게 팔짱끼고 다닌 것이 별로 없음을 아쉬워한다. 못내 마음에 걸린다. 여자는 남자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울음을 터뜨리고 한번 힘껏 안아줌에 최대의 기쁨을 느낀다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나는 내 안해가 나이를 먹어가고 젊음을 잃어가는 것을 서러워한다. 항상 젊고 신선하고 아름답게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지만, 세월은 거스를 수 없어 오는 세월은 멈추게 할 수 없지 않은가. 마음만은 젊게 살고, 정신만은 처음 같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바보같이 꿩이 품안에 들어와도 몰랐고, 구슬이 들어와도 몰랐다. 만약에 지금 우리 둘 중의 하나가 죽는다면 그동안 내가 한 잘못과 무례는 어디에서 용서받고 그동안 애써 공들인 것들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신실하고 후덕하기는 「자기가 죽으면 어의들을 살려주라.」고 유언하는 明太祖의 부인 馬皇后 같은 사람의  뜻하지 않은 말이 뜻하지 않게 나로 하여금 많은 상념에 젖게 한다. 이것은 80세가 넘어 이혼을 청구하는 것과 같은 범주의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신여성의 도래 인가. 이것은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는 月下老人의 주술이 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李相和와 柳寶華(보화가 죽자 尙火는 이별이라는 시로 슬픔의 극치를 나타냄), 靑馬와 丁芸 이영도는 그때까지 求心力이 작용했는데 우리는 이제 遠心力의 영향권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어떠면 백년해로(百年偕老)하고 천년동혈(千年同穴)하는 것은 화석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이나 맹세를 하지 않고 믿지 않는 나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재확인을 하라는 것일 게다. 안해의 말은 결국 인간은 단독자임을 알리고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어쩌면 보리 서 말의 값에 지나지 않는다는 示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알고 있는 것들은 다 신기루이고 허상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동안 실체가 없는 擬制된 것을 믿고 살아온 것이다. 나는 오늘 안해의 말에서 모든 것은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랑도 슬픔도 애달픔도 측은함도 내 존재의 이유와 존립근거도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2007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