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간의 즐거움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인가? 금동이 옥동이하는 그 금쪽같은 아들이며「자식은 용사의 전통에 들어있는 화살과 같다.」고 일찍이 이스라엘의 시인이 말한 그 아들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고. 커서는 현진건이 발가락이라도 닮았으면 한 그 아들이자 장돌뱅이 허생원이 달빛 속에서 훔쳐본 아들 동이가 아니던가. 그러한 아들임에도 한국정치에서는 그 아들이 불행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들에 의해서 한국정치의 치부가 드러나고 한국정치의 봉건성과 퇴행성이 쉬 가시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써 일하고. 힘써 구하는 까닭은 아들로 대표되는 종족보존력이 이미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생산력 증진의 상징이었고. 사유재산의 중심이었으며. 계급제도의 시초였다. 인간의 온갖 사유체계는 아들을 빼놓고서는 성립되지 않고 발전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머물러 아들에게 여행을 시키지 않고 매를 아낀다면 그 아버지는 고슴도치의 새끼사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들은 얼굴은 익히 아나 속내는 모르는 이른바「천지는 사람이 없으면 영적으로 되지 않는 」미분화 미개의 시대에 살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인 아버지들은 꽤나 영악해서 권력은 오래 쥘 수 없고. 명성도 빛바래지는 것을 알아 그래도 돈은 시대를 넘어설 줄로 믿고 있다. 봉이 김선달이 금호강을 팔아먹은 재주나 양반 허생이 매점매석을 해서 돈을 벌게 된 비결을 자식에게 전수하는데 바쁘고. 돈 후안이 어떻게 처자를 호리고 박인수가 어떻게 아녀자를 끌었는지가 모의하듯 바통이 되고. 간신 진회가 악비를 모략하고 남곤과 심정이 어떻게 조광조를 음해했는지를 배우는데 가세를 기울이고 가운을 걸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 이 나라에는 일목요연하여 다른 선택은 집안의 전통(?)이 깎이는 짓이다.
그러나 200년 전만 하더라도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간에 아름다움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중기 육창(六昌)으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시로서 이름이 높았던 김창흡이 조카의 죽음에 지은 만시(輓詩)중에 「인간세상에서 부자간의 즐거움은 산간에서 도의를 논함이 제일이라(人間父子樂 林下 道義眞)」고 고백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때에는 가풍이나 가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아버지와 아들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숲속이나 강변의 정자에서 또는 심야의 정담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논하고.
주자학과 양명학 둘 다 왜 필요하며 .송시열과 정약용이 우뚝 선 이유를 캐고. 장자와 윌리암 워즈워즈.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일생을 비교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른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의 만끽일 것이다. 그러한 집안에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자식 최영이 있을 수 있으며. 울분과 변통(變通)의 작품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나올 수 있으며. 성승과 성삼문은 부자간임을 천하가 알고. 민중전을 위해 죽고 조선을 위해 죽는 아들 박태보와 아버지 박세당이 오늘도 수락산 자락에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위항시인으로 속리산 기슭에서 농사만 짓다가 죽은 책벌레 아버지 정윤과 역시 책벌레 아들 정희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가 소외라는 말이나 보상이라는 말 몇 마디로 덧칠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았던 것이다. 과연 우리 아버지들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아들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며 무엇을 상속시킬 것인지도 차체에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자문하고 또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간에는 교감이 있어야 하되 옛사람이 말한 「도의를 논하는 것」이 최고의 부자지간이라고 손꼽을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