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적 엘리트, 자연적 엘리트
톨스토이는 당시 사치에 빠지고 방탕에 빠진 귀족들에게 피폐한 농촌에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그랬었다면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 마오쩌둥의 하방(下方)이 당시에는 지옥이었으나 그 처절함 때문에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정책이 탄력을 받았다는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
우리는 때때로 한 작가의 불행은 그 개인에게는 고통이나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다행이자 축복이라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 말들을 떠올리는 것은 「상처 난 조개에서 진주가 생기고」「상처 난 풀이 더 향기롭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누구나 다 선하고 누구나 다 인자하고 누구나 뛰어나다고 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따금 선하고 가끔씩 인자하며 드물게 의로운 것이며 사람도 피라미드 구조와 똑같아 무리 속에 빼어난 사람이 있으며 발군(拔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휴머니스트인 맹자와 루소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이 세상은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발전하고 진보할수록 불평등은 심화되며
cnb의 칼럼니스트 이근진님의 피력처럼 자유와 평등은 병진도 하지만 대치되는 개념임도 수긍한다.
나는 앞으로의 세계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경쟁이 극심하기 때문에 우수한 엘리트의 확보가 관건일 것이며 그것은 곧 자율적이고 창의성이 있으며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인재에게 달렸다고 보는 것이다. 국가의 경쟁력이나 세계로 진출하는 근성의 한국인을 위해서도 우물 안 개구리나 온상 속의 화초가 아닌 야생마 같고 야생화 같은 인걸이 많이 나와야 한다.
정신적으로 나약하여 쉽게 좌절하고, 가벼운 것에 절망하여 자살을 하는 유약한 사람들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에는 밟아도 일어서는 잡초 같은 사람들- 7전8기의 오뚝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하며 그 중심에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엘리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아이들이 조련과 양식(養殖), 사육의 힘으로 이른바 SKY 대학교에 많이 가는 현상을 충정과 고심(苦心)으로 우려하고, 지금의 무분별한 해외유학과 수능점수를 잘 받기 위한 선행학습도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학위를 따고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인 동종끼리의 겨루기요 오합들의 반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대학들이 있기를 바라며 하바드나 예일이나 프린스턴대학 같은 수준의 대학도 나왔으면 한다. 수월성이 장려되고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법칙이 권장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인재조달방식이 지금처럼 모방과 답습의 죽은 교육에 의지한다면 지금이 우리나라 5000 년 역사상의 유일한 전성시대이고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급기야는 나약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어느 날 또다시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엘리트들은 이전처럼 불균형하지도 지금처럼 편견도 아니며 앞으로 예견되는 순치(馴致)도 아닌 만기(萬機)를 총람(總攬)하는 엘리트, 전천후적 엘리트를 바라는 것이다. 이 엘리트들은 문약(文弱)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나 서하(西夏) 요(遼) 금(金)에게 굴욕을 당한 남송(南宋)이나
무신들에게 억눌린 고려시대의 문신들이 아니라 강건하며 웅혼하고 진취적이며
활달한 엘리트이다.
나는 강남을 누구처럼 불온하게도 보지도 않고 쓸어버려할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물질적·상업적 역할에서 벗어나 정신적·문화적 구심점이 되길
바라며 견인차 역할도 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저들의 엘리트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돈으로 치장을 하고 돈으로 뼈대를 세워 수재를 만들고 준재를 만들 수는 있으나 영재나 천재는 스케줄을 짜고 기획을 한다고 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고나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한 엘리트를 원하지 의제(擬制)되고 강제(强制)된 엘리트는 그 효용이 얼마 안 되고 곧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국가는 천분이 뛰어나고 천품이 훌륭한 학생들을 발굴하여 단련을 통하여 일당백(一當百), 일당천(一當千)의 자연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 의무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개인이나 가문에는 영광일 수는 있으나 국가적으로는 손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내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날 교육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어 신분의 대물림이나 지위의 대물림도 걱정을 해야 하나 더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나약(懦弱)의 대물림과 소심(小心)의 대물림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위의 세습은 때로는 10만 명 100 만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어 용인할 수 있지만, 약골의 대물림은 본인은 물론 집안까지 망하고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자생력만 검증된다면 보수의 장점인 온후함과 책임감이 강한 강남의 자제들이 서울대학교에 많이 가고 사회지도층에로의 진입을 환영하는 입장이다.
나는 인공적 엘리트와 자연적 엘리트의 차이는 오늘처럼 추위가 닥쳐와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기백을 아는 것처럼 사람도 어려움이 닥치고 곤경에 처해 보아야 진면목을 발견하고 능력이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본다.
오늘날 같이 기존에 안주하고 기성에 기생하며 답습과 주입, 모방에 남달라서 엘리트로 불리기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인 엘리트, 야생화 같은 자연적 엘리트가 많이 나와야 한다. 현대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엘리트를 원한다. 모험심이 강하며 도전적이며 실패에서 배우는 엘리트가 진짜 엘리트이다.
자연적 엘리트는 기존의 것을 나누는 레드 오션도 잘 할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블루 오션에서는 더욱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백면서생이라 탁상공론이나 하고 공염불을 외우며 지시나 명령만 기다리는 피동적인 인공적 엘리트가 아니라 난관을 헤치며 상상력을 극대화할 줄 아는 자연적 엘리트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헝가리 정신이고,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밑바닥 정신이며, 젊었을 적의 여행이고, 한 대 더 맞는 회초리일 수도 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고 서민의 애환을 겪어본 것일 수도 있다. 이 자연적 엘리트는 정치를 하거나 경영을 해도 끝까지 배와 함께 침몰하고, 책임은 내가 지고 공은 동료에게 돌릴 것이다.
-오늘날 민생이 어렵고 정치가 막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07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