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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말 한 마디

무릉사람 2019. 4. 10. 18:30

태초부터 말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말로 희노애락을 표시했으며 그들의 경험을 말에 실어 후대에 전했다. 그것은 결국 인류의 보존을 가능하게 했고,  생각의 공감현상을 일으켰다. 이 말의 역사는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말들과 역사적 대면(對面)을 하거나 우주적 조우(遭遇)를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때로는 통렬함과 전율을 동반하며 오기 때문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 황홀하고, 신 내림처럼 사람을 부르르 떨게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고, 그때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 인생은 이렇게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들은 술(酒)과 책(冊)이 그러하듯 오래될수록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지지를 받았다. 발설자(發說者)나 누설자(漏說者)가 누구든 하늘의 뜻을 인간세상에 전하는 것이었다. 이 말들은 역사의 금광(金鑛)에서 캔 것이며  우주의 화수분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것들은 선인들의 절실하고 절박했던 순간의 반영(反影)이자 투사(投射)이며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었다 .


이 말들은 선인들의 전기(傳記)나 일대기(一代記)의 요약이라 할 수 있고  자서전이나 고백록의 압축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 낭보(朗報)와 비보(悲報)를 같이 전했으며, 목마를 때 샘물이었고 더울 때 그늘이었으며 추울 때는 화롯불이었다. 그것들은 내 영감의 원천이었고 내 지평의 확대경 구실을 하였다. 나는 단지 뒷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의 결정체와 야심작(野心作)을 거저 대하고,  그들의 정수(精粹)와 총화를 아무 수고 없이 얻으니 어, 나는 언제나 빚진 자였다.

 

독서백편 의자통(讀書百遍 意自通)이라고 어려운 글도 많이 읽으면 저절로 뜻이 통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이 「사건」은 즉자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뜻을 바꾸기 때문에 과히 운명적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세상에는 추수(推數)나 촌탁(忖度)이나 천착(穿鑿)이란 말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뜻을 캐거나 뜻을 묻는 유일한 동물로써 사람만이 의기(意氣)를 지녔다는 표시인 것이다. 사람은 특정한 때나 특정한 말에 의해서 심장이 찔리기도 하고 폐부가 찢어지며 창자가 끊어지고 혼이 불살라지기도 한다.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 소리는 이따금씩 결단과 선택, 집중을 불러오기도 하고 가끔씩은 용서와 참회를같이 부르기도 한다. 이 말들은 내 젊은 날 나를 뜨겁게 했듯이 오늘도 나를 뜨겁게 하며, 지금도 내 어렸을 때의 다짐을 일깨우며 청년기의 호기(豪氣)를 불러일으킨다. 그 말은 루소의 「진리를 위해 신명을 바친다.」일 수도 있고, 요한 웨슬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며, 공자의「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라.」도 되고, 석가의「라훌라여, 나는 이제 열반에 들면서 다시는 다른 사람의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니 너도 다시는 다른 이의 아들이

되지 마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말이야말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미당(未堂)의 소리이고,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는 청마(靑馬)의 부르짖음이다. 또 이 말은 30세 이후에는 남을 위해서 살겠다는 시바이쩌의 결심이고, 학문을 위해서라면 절친한 친구와도 결별하며 나의 길을 가겠다는 임마뉴엘 칸트의 결의일 수도 있다.

 

나는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놀라야 하고 얼마나 더 화내야 할 줄 모르지만 이 말들의 어느 것은 나를 분기시켰고, 어는 것은 나를 열광하게 했으며, 어느 것은 나를 잠잠하게 하였다. 이 말은 앞으로 기회가 별로 없는 것을 전제하게 때문에 절망으로 다가오고,  또 이 말은 그래도 실 날 같은 기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희망의 메시지로 꽂히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요소요소에서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고 구비 구비마다 나를 다독거리며 어루만진다.


나는 젊었을 적에는 뜻을 세우고  뜻을 장대하게 하는 것들에 심취했으나 세월의 풍화작용에 따라 세상의 녹록하지 않음을 알게 된 때부터는 모든 번민하게 하는 것들에 괴로워했다. 이제는 초극과 체념의 어우러짐이 내 주조(主調)임을 잘 안다. 그것은 청년의 때에는 꿈을 심고 용기를 불어넣는 말들에 고무되었으나 지금은 인생을 규정(規定)하고 세상을 규율(規律)하는 것에 친근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내게 어필(appeal)하는 말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말이 오늘의 내 심금을 울리는가? 그것은 어느 중국의 옛 시인이 말했다는 「가인(佳人)도 진토로 돌아가는데 그 외의 분장한 것들에 있어서는 말해 무엇하리.」라는 말과 역시 이스라엘의 옛 시인이 말했다는 「우리의 연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이니라」의 두 마디이다.


이 말들이 내 가슴 속 깊이 다가오고 내 속을 휘젓는 것은 내가 이제 이 말을 한 사람들과 동년배가 되었고 나의 선배나 나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세상을 일별(一別)할 수 있는 나이테라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내 아이들을 포함한 젊은 세대들도 장차 내가 머물렀던 이 자리에서 나와 똑같은 것을 붙잡고 상념에 잠길 것이라는 것을 내가 미루어 알기 때문이며.


이것은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굴 쪽으로 두고 사람도 죽을 때는 착한 말을 한다는 말과 그리 멀지 않으며, 중천(中天)을 넘은 해가 그러하듯이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음)이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처음에는 밉게 돌아가다가 나중에는 그리워지는 쓸쓸하고 외로운 우물 속의 또 다른 나인 것이다.

 

나는 이 옛 시인들의 말에 경탄을 발하기도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기도 한다. 경탄은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한 그 천재성이고 경악은 내가 이들 말에서 시대를 꿰뚫는 예리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고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릴지는 모른다. 또 어떤 일이 돌발(突發)하여 나를 통타(痛打)하고 어떤 일이 돌출(突出)하여 나를  난타(亂打)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여태까지 앞서의 다른 말들에서 빛을 발견하고 힘을 얻었던 것처럼- 이 말들에 의탁하고 의지 삼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앞으로의 남은 인생은 그 말들이 언뜻 전하는 것처럼 허망이나 허무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애잔(哀殘)한 정을 가지고 이전보다 더 힘껏 인생을 포옹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인생을 대별(大別)하고, 정의하며, 장식할 말을 그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꽤나 해야 할 것이다.


20007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