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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등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는 이유

무릉사람 2019. 4. 10. 18:34

1.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강원도 어느 시골에 A란 학생과 B란 학생이 살았습니다.

A와 B는 반장과 부반장을 같이 했으며 같이 등하교를 했고, 같이 먹고, 같이 자기도하고 또 밤늦도록 도서실에서 책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A의 집은 부자였고 B의 집은 가난했습니다. 그 당시 B는 요즘말로 하면 자력으로 3년 위의 선행학습을 하였으며 역사지식은 돋보여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선생님이 오히려 되묻곤 하였습니다. 그 뒤 A는 순조롭게 명문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유수 대학교를 나와 지금은 국립대학교 역사학의 교수님을 하고 역사학으로 박사님이 되었습니다.


B는 서울로 유학(?)을 와서 신고의 세월을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의 「황금의 잣대」인 사회적 평가에 따르면 B는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B는 일본의 시인인 이시가와 다꾸보꾸가 친구가 출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꽃을 사 가지고 와 아내와 희롱한 것을 떠올리며 흔쾌히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B는 나였고, A는 나의 죽마고우입니다.


2.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내가 오늘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과 편견을 없애는데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입니다. 나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를 뼛속까지 체험한 사람입니다. 언뜻 봐서는 이 사회를 혁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악(惡)의 덩어리로 보고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가 그를 낳고 길러 준 로마에 대항한 것처럼  타파해야 하고 분쇄해야 할 성장 배경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최선은 아니지만 아직은 인간이 고안한 것 중애 가장 뛰어난 제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배척하고 섬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견지에 서는 것은 자유와 자본이 사람의 본성에 가장 근접하며 본성에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자유와 자본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성정을 이용하는 반 moral의 제도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의 계산으로 일을 해야 효과가 오르고 능률이 생긴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이 창안하고 구축했습니다. 미화해서 말한다면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이유입니다. 나는 자본주의가 없었더라면 민주주의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물질적 번영은 물론이고 지적능력도 훨씬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자유와 자본의 내재적인 힘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유는 몰가치  몰개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개성이 발휘되고 기회가 훨씬 더 열려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주를 조망하는 사람에게는 부귀나 공명은 아무것도 아니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탈속을 시도하며 세간(世間)을 벗어나려고 애쓸 뿐입니다. 셋째는 인생에는 크게는 3번 작게는 12번 기회가 있는데 나는 게으르고 우매하여

기회가 있어도 살리지 못한 것이지 원천적으로 기회가 봉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지금은 그나마 있는 것마저 잃었지만 소성(小成)에 만족하지 않는 나의 기질 탓입니다. 풍운(風雲)을 몰고 오고 싶었습니다.  다섯째는 팔자론이나 운명론으로서 사람은 다 자기 분수가 있는데 이를 넘는 것은 역천이고 역린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은 모순의 탄생에 의해서 불평등과 억압은 영원히 존재하며 태생적이고 원천적인 이 힘 때문에 발전하고 진보할수록 조여 오는 힘은 더 강하다는 메커니즘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3.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남부여대(男負女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풍찬노숙

(風餐露宿) 단사표음(簞食瓢飮) 등이 나를 위해서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원인이고 시발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생활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보헤미안입니다. 언제나 집시였고 낭인이자 시대의 유민이었습니다. 주변인이자 서자(庶子)로서 허균을 가르친 손곡(蓀谷)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옛날에는 호구지책의 선에서 끝났지만 작금에는 내 인식의 기저와 의식의 상층부까지 점령하고 있어 지평이 열리고 눈이 밝을수록 식자우환의 짐까지 떠안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나 다 하는 부모에 대한 원망의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을 원망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남자는 15세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을 따랐지만  선택이 빗나가고 판단이 틀렸고 운명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잘못이면 잘못입니다. 요즈음 가난의 대물림이요 신분의 세습이요 지위의 영속화가  사회 문제가 되어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이것을 보수와 진보, 개혁과 수구로 정의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이고 언어의 사치입니다. 서민들에게는 생사의 문제입니다.

지금이 봉건 신분제 사회도 아닌데 현실은 봉건 신분제 사회와 흡사합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사회의 여러 모순을 목도하고 그것들에 신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수구들이 말하는 좌파의 입장에 서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강남의 돈 많고 지위가 높고, 시간이 많은 사람들 보다 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자율과 창의성이 보장된 사회가 유토피아이고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나라이고 최강의 체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장이 먼저이고 분배는 나중이며 성장을 한 결과가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면 분배는 자동적으로 차고 넘친다는 생각입니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입니다.

이 말은 조 중 동이 전하는 것을 앵무새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닌 척박한  이 나라에서 온몸으로 부닥치며 배운 것입니다.

일찍이 쳔형(天刑)을 받아서 대중은 언제나 하이이나(탐욕자 )이며  들쥐(기회주의자)입니다. 언제나 그 천성이나 본성, 모형을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엘리트들이 교화하고 계도하며 모범을 보이고 솔선하여 새벽이 오면 어둠을 몰아내듯이 점진적인 외연의 확장이 필수라고보는 것입니다.


4.

하늘이 준 성정을 거역하면 일시는 힘을 얻고 이름을 얻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도로(徒勞)로 끝나며 실패로 귀결됨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본뜻이 살아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지만 그것들이 사이좋은 개념이 아니라 내치는 것임을 안다면 적지 않게 당혹해 할 것입니다.

신권(神權)과 왕권, 기타 다른 물리력과의 싸움에서 자유는 이겼으나 그 자유분방한 성질 때문에 곧 만만찮은 적을 만나니 평등주의입니다. 그러나 평등은 자유의 반면교사이기 때문에 천성과 자유가 우선이고 근본이지 평등은 그 하위개념입니다.


결코 평등은 자유의 본질을 침해해서도 침범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평등은 언제나 투쟁을 통하거나 시혜적으로 얻는 것이지 본래부터 자명(自明)한 것이 아닙니다. 평등이 자유를 제치고 전면에 나서면 그것은 포퓰리즘이 되고 생산성은 떨어지며 생산력은 낮아져 하향평준화가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론입니다.

나는 야만과 미개의 상태 곧 자연 상태의 사회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경쟁 공정경쟁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의 실패를 막아주고 바로잡는 기능에 제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약자나 사회적 패자들을 위한 김근태 의장의 패자부활전을 아주 높게 평가합니다. 복지나 후생은 이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사회적 기반시설이자 최소한의 인간의 위엄을 위한 장치입니다. 나는 유물사관이나 계급투쟁설이 자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방만과


방종을 억제하고 견제하기 위한 소중한 이론이며 유용한 지렛대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권이 없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상층부에로의 이동이 쉽고 꿈을 꿀 수 있으며 활력이 넘쳤으면 합니다. 체제가 경색되고 거대화해 지면 아득한 시대에 공룡들이 외부의 공격은 물론 자체의 부적응으로 멸망한 것과 같이 나라도 도태되고 쇠락할 것입니다. 보수(保守)는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도 자멸을 면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끊임없이 개혁하고 정화해야 합니다. 혁신과 정화, 온후함과 책임감은 보수의 Noblesse Oblige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전거가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과 같이 보수의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과  로마노프왕가의 짜르(Czars)화를 막아주는 것입니다.


5.

나는 자유는 언제나 중심이며 평등은 변두리이고 자유는 발광체(發光體)이나 평등은 암체(暗體)이며 자유는 상수(常數)이나 평등은 변수(變數)이고 자유는 인간의 것이나 평등은 하늘에 속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자유가 표출(表出)이라면 평등은 자제(自制)이며 자유가 야생이라면 평등은 교양(敎養)이며 자유는 차별을 용인하고 간섭을 거부하나  평등은 차별을 부정하고 참견을 인용하는 것이며 자유가 부작위이고 무위(無爲)라면 평등은 작위이자 유위(有爲)라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동양의 사상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자유를 추구하고 공맹사상(孔孟思想)은 평등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승자 독식이 자유라면 승자 공유는 평등으로서 정치는 이 껄끄러운 관계인 자유와 평등을 화해시키고 조화시키는 것이 본령임도 밝혀집니다. 사회정의란 것도 평등의 기계적 교조적 선언적 적용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적으로 충실할 때 확보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언제나 뽐냄이었으나 평등은 슬픔인 것입니다.

자유를 지키면서 평등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만 그것은 난제로서 언제까지나 미해결의 장으로 남을 것입니다. 나는 평등도 사랑하지만 자유를 더 사랑합니다. 그것은「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인간」의 길을 걷기로 했다는 것이 압축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고 인간에게 헌신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억겁의 세월동안 비와 바람에 닦이고 씻기어 그 광채를 빛내듯 사람의 정신도 구애가 없고 장애가 없을 때 더 빛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산문정신(散文精神)과 통하며 산문정신은 나의 생명입니다. 그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습니다.


2007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