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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검투사되어

무릉사람 2019. 4. 10. 19:12

기견송백추위신(己見松栢推爲薪)이미 보았노라. 송백나무들이 잘려서 땔감이 된것을

경문상전변성해(更聞桑田變成海)또 들었노라, 뽕나무밭이 변하여 창해 됨을-

년년세세화상사(年年世世花相似)해마다 피는 꽃은 똑같은데

세세년년인부동(世世年年人不同)해마다 보는 사람은 다르다네.


위 시는 중국 당나라 초기 유정규(劉廷茥)라는 문객이 지은 것이다.

시가 세상에 나타난 이래  이 시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이 시처럼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내며. 이 시처럼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 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확실히 옛날에는 숱한 전란과 굶주림과 혹한과 질병으로 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봄이 와서 산골짜기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면 화전(花煎)을 해 먹고 화관(花冠)을 쓰고 놀던 친구가 더 애틋하게 떠올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같이 제사를 지내며 같이 벌초를 하고 같이 투호(投壺)를 하던 동기라면 접동새 소리는 못 들었어도 그리움에 사무쳐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날 논리전개를 배울 때, 연역법의 대표적 사례인「사람은 죽고, 나는 사람이고 그래서 죽는다.」를 모범문형으로 수없이 익혔지만, 여전히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죽는다는 것을 잊어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가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안 될 것이고, 경제는 마찰음이 덜 할 것이며, 사회는 시끄럽고 험악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도둑같이 오는 것이고 삶이란 것이 제한적임을 안다면 우리의 관심은 특정인에서 불특정다수인으로 관심이 넓어질 것이며. 허무주의는 쓰러지는 허무감이 아니라 일어서는 허무정신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다.


「철들자 노망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인생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고 인생을 안다 싶으면 대부분 만시지탄(晩時之歎)인 것이다. 그래서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도연명(陶淵明)은 분석철학의 대가이고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주자(朱子)는 계량철학의 대표라고 봐도 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Once Again」할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것은 미망

(迷妄)인 것이다.


「내가 지금 사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오늘이다.」라는 말 앞에서는 어떻게 항거할 수가 없으며. 우주 속에 시간은 무한대나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람은 죽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낙화(落花)」에서 이형기 시인이 「내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는 구절은 내 인생은 꽃답게 죽는다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며


「청춘은 아름다워라」라는 소설이나 「청춘예찬」이라는 수필이 있지만 꼭 청춘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달라 그 계절의 정취를 드러내듯 인생도 한 획 한 획이 저마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해(曙海)나 일해(日海)가 아름답다면 저녁놀이나 저녁바다도 아름다울 것이다. 오히려 저녁놀 같이 인생을

장식할 수 있다면 그는(그미는) -가을날의 국화처럼- 최후 최고의 웃는 자가 될 수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네 인생은 검투사(劍鬪士)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작년 초인가 CEO들의 좌우명 소개를 지면에서 보았는데 그중 어느 CEO는 「매일 매일을 검투사처럼 살겠다.」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예사롭지 않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택한 통찰력과 지적 감수성에 감탄을 하면서도 마치 소중한 것을 빼앗긴 듯 하고 선점당한 것 같은 것에 질시(嫉視)를 느꼈다. 여러분은 로마제국과 관련된 영화들을 통해서 검투사들의 일생을 스케치했을 것이다. 검투사하면 「오, 로마여, 로마여. 나를 길러준 은인인 로마여! 피리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어린 목동에게 철과 같은 근육과 불꽃과 같은 마음을 갖게 한 것은 그대 로마인 것이다. 로마여. 로마여! 이 스파르타쿠스는 싯누런 치벨 강물이 핏물이 되어 그 속 깊이 그대의 핏덩이가 뭉쳐지도록 그대에게 보복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하며 로마를 크게 위협한 검투사들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비록 로마라는 저력(브랜드파워)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것은

대부분 오늘날 수렴되었다. 검투사는 「누미지아 사자」이든 동료와 싸우든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다. 오직 상대방을 쓰려 뜨려야만 오늘이 담보되는 것이다.


그러니 추호도 방심할 수가 없고 검과 육체와 정신이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 그 CEO도 이 정경을 떠올리면서 만나는 고객, 치루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을 것이다. 검투사의 정신은 「간과(看過)하지 않고 일실(逸失)하지 않겠다.」는 정신이다. 현대적 의미로는 리허설도 없고 앙코르도 없는 인생을 타이트하고  리얼하게 살겠다는 의지이다.  치열하고 격렬함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도 이들 검투사들이 그랬듯 흔들릴 수 없으며 뒤로 물러설 수 없으며 눈을 아래로 떨어뜨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 검투사들은 사자나 노예나 포로 신분의 검투사들을 대적해 죽였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검투사들은 부정을

찌르며 불의를 베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자기에게 무한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문밖을 나서면 저승이라.」는 우리나라 만가(輓歌)의 한 구절처럼 내가 오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밋밋한 산천도 괜찮게 보이고 시큰둥한 사람도 정답게 보일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 하는가? 단지 실존적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고 내일을 유추할 뿐인 것이다. 오직 오늘만 있는 것이다.

인생을 포옹하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시간 역사 우주 학문 인류애 등에 소홀하고 등한하고 박대해서는 안 될 소이인 것이다.


우리가 그 옛날 로마의 검투사들이 가졌을 절망감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너그러워질 수가 있고 그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감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보다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측은지심」이라 했고, 나의 어머님은 기르던 개나 돼지를 팔면서 되돌아 우신 것처럼

연민과 동정은 그 검투사들이 죽어가면서 그려봤을 세상일 것이다.

올해는 예전보다 12일이나 빨리 꽃들이 필 것이라 한다.

꽃이 일찍 피면 우리야 꽃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감상할 수 있지만

저 꽃들을 보지 못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도 그만치 일찍 올 것이라 알고 있다.


2007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