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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패자들을 위한 발라드

무릉사람 2019. 4. 10. 19:18

勝敗兵家事不期 (승패는 병가도 기할 수 없다.

抱羞忍恥是男兒 (수치를 참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남자다.)

江東子弟多材俊 (강동의 자제에는 준재가 많다.)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 아직 알 수 없다.)


-위 시는 초한지(楚漢誌)의 한쪽 주인공 항우(項羽)가 99번 싸워 이겼으나 100번째 마지막 싸움인 해하성(垓下城) 싸움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리자 영원한 정인(情人) 우희(虞姬)와 죽음으로 헤어지고, 고향땅이 보이는 오강(烏江)에 다다라 「혼자만 살아 강동의 부형들을 뵐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역사적 사실을 훗날 1000년이 흐른 뒤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이 항우를 그리며 읊은 것으로서 권토중래(捲土重來)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두목은 항우가 자결한 오강가에 세워진 오강정(烏江亭)에서 옛일을 떠올리며 항우가 그때 수치와 분노를 참고 다시 유방(劉邦)과 천하쟁투를 벌였더라면 그 결과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라며 못내 항우를 애석해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시를 올린 것은 이맘때가 옛날에는 춘궁기(春窮期)의 시작이어서 생활들이 어려웠었는데 오늘날에는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고, 갖가지 고시의 당락이 알려지며, 공무원 인사가 예정되어 있고, 기업들의 주총시즌이라 사람들의 마음이 술렁거리는 등 희비가 엇갈리는 풍경의 계절로써 여기에서 사회적 승자들은 대우를 받고 기뻐할 수 있지만 사회적 패자들은 낙담하고 낙루(落淚)하여 심지어는 자살도 감행하기도 한다. 이에 나는 내 젊은 날, 뜻을 간직하게 하고 용기를 심어주었던 이 시가 그때 내게 유효했던 것처럼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효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은 슬프게도 우리의 운명이고 부인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우리가 유한한 생명체로 사는 한 누구에게 부담시키고 누구에게 전가시킬 수 없는 생물학적 한계인 것이다. 단지 우리는 풍우순조(風雨順調)나

천우신조(天佑神助)같은 하늘의 도움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에 의해서만 그 법칙들을

중지시키거나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초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전제를 알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복잡다단한 인간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인프라가 완비되어서 사회적 패자나 약자들을 구휼하고 부조하는 것이 좋겠지만 정부의 예산문제도 있고 정책의 사각지대도 있을 수 있으며 정부가 할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사적인 영역도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거니와 대책이 나오면 실책도

야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상기하여 스스로 돕는 것에 투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직립보행이 아득한 옛날에만 사람을 사람답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자립하고 독립하는 인간이야말로 자유인인 것이다. 오늘날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도 심층을 파고들면 여성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상관관계가 높으며. 중세시대나 오늘날 드문드문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이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해서 자급자족하는 것도 정신의 자유 사유의 독립을 ‘꿈꾸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호품이나 구호성금이 꼭 감지덕지할 것도 아님도 알게 되는 것이다.


한 두 번의 실패란 것은 「Easy come, easy go.」나 「 Practice makes perfect.」란 말이 영어의 정설(定說)이 된 것처럼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내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가치가 있으며, 태어나면서 소질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소질도 끊임없이 계발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완전한 것으로 귀결되고 수렴된다는 것이다. 여러 번의 실패도 그렇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짐」을 우리는 안다. 큰 종은 늦게 만들어지며. 재목으로 쓸 나무도 오래 키워야 한다. 그러니 일희일비는 금물인 것이다. 오히려 서광이 보인다면 고통은 아름다운 것이다.「인생사 새옹지마」란 말도 그렇다. 어느 것이 복이 되고 어느 것이 화가 되는지 인간의 얕은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 때 일부러 낙마(落馬한 허종(許琮)의 지혜를 갖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대롱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자들이고,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도 강가의 자갈처럼 하찮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오묘한 이치는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때란 것이 있고, 음덕이란 것이 있으며, 발원(發願)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벌거숭이로 태어나고 빈손으로 태어난 것은 배우고 익히면서 성취하고 창조하는 하느님의 기쁨에 얼마간이라도 동참하라는 하늘의 배려이다. 이것을 모르면 무엇을 하든 짜증만 날 것이고 무엇을 얻어도 만족을 모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생에서 최고의 정신양태는 because가 아니라 in spite of 의 정신이라고 알고 있다. 너 때문에 사회 때문에 제도 때문에 야당 때문에 언론 때문에가 아니라 나한테 원인이 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범하고 의연하며 초연하겠다는 자세인 것이다. 이것은 국가경영이전의 인간경영으로서 인생을 긍정하며 나를 수긍하는 강한 자기애(自己愛)이자 운명애(運命愛)인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종교와도 화답을 하니「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그의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원망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그 품성적(品性的 )신뢰인 것이다.

그리고 소지공양(燒指供養)을  하며 소신공양(燒身供養)도 해서라도 발원하겠다는 것에서 우리는 인간정신의 극치를 보고 인간정신에 대단원의 방점을 찍게 되는 것이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들은 아주 소소할 수가 있다.

눈을 들어 우주를 바라보아야 할  이유이다.


2007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