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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사법질서유지법을 나무란다

무릉사람 2019. 4. 13. 09:16

김명호 교수가 법원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담당 재판장에게 석궁을 쏜 것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잘못한 것이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조금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김 교수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정당성이나 순수성은 의심을 받고 구제방법은 물 건너갔으며, 있다면 세간의 미약한 동정론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법적으로는 「한 사건」이지만, 그 법철학적 사회적 파장은 일

일파만파(一波萬波)이다. 그동안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미명아래 개혁에 방치되었고 요지부동이었던 사법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사법부의 좌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하는 전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기존의 철옹성 같은 사법부에 균열이 가고 해체가 되는 소리를

들었으며,  러시아 동토(凍土)를 연상하게 하는 사법부에 제비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물론 제비 한 마리가 날아들고 봄바람이 한 번 분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봄이 가까이 옴을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조선시대의 과거(科擧)와 일제시대의 고등문관이라는 혁혁한 전통을 계승한 것을 잊지 않았는지 고답적이고 고압적인 법원이었다. 그동안 대민서비스도 낮고 법률용어도 현실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조문이나 판결문은 가언적(假言的)이거나 이중부정형(二重不定形)이 많고 외교적 언사를 떠오르게 하여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법원이었으며,

전관예우」가 「조폭의 의리」 못지않고, 「전별금」은 황군식 인사법이었고, 조직에 거슬리는 의견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완강한 법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인혁당사건의 무죄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는 구부리고 휘어질 줄 아는 법원이었다.


그런데 그 법원에서 판사가 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가칭「사법질서유지법(안)」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나는 이것은 한 마디로 넌센스요 오버액션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규정하겠다는 법만능주의적 발상이자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사법의 영험함이자 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겠다는 관료들의 행정편의적 사고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법가(法家)들이 형명(刑名)이니 법술(法術)을 강조한 것은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의 최소한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다. 몽테스키외(Montesqieu)의 「법의 정신」도 무소불위의 믿을 수 없는 절대권력 앞에서 인권을 보호학고 권력기관 상호간의 견제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보다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점령한 다음에 맨 먼저 발 빠르게 시행한 약법상장(約法三章-1사람을 죽인자는 죽인다.

2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도적질한 놈은 응분의 책임을 진다 3진나라의 악법은 폐기한다)은 번잡하고 위혁적인 법들이 사람들을 옭아매고 괴롭혔기 때문에 모두 폐지하고 꼭 필요한 법 규정 3개조를 둔 것이다.


법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예외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이 차량의 운행을 규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로의 원활한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법은 최소한의 필요에서 그쳐야 한다. 법은 실생활을 제대로 반영해야 좋은 법이지만 우리가 법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

법의 사문화」「법의 화석화」가 최고의 법치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사법질서유지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폭력 앞에 더 큰 사법의 폭력으로 맞서겠다는 응징적 사고이며  모기보고 칼 빼드는 과잉대처로서 법원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판사들이 아무리 자위차원이라 하지만

오늘도 산업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많은 노동자들이 이들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낙석격퇴법(落石擊退法)이나 낙하비행법(落下飛行法)을 만들겠다는 것이며 군인들이 실제교전이나 훈련 중에도 목숨을 읽기도 하는데 저들도 「彈알退治法」이나

「砲彈忌避法」을 만들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차이라면 법을 만드는데 핵심거리에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용이 하냐 어려우냐의 차이이고,

여론을 탈 줄 아는 기술의 유무가 차이라면 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모든 자연현상까지도 예로 태풍엄습죄 홍수범람죄 등의 죄목을

신설하여 자연을 법의 영역으로 끌어넣고 자연재해까지도 규제하고  장악하겠다는 유치하고도 엉뚱한 생각인 것이다. 미국의 서부 개척자시대 때 보안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악당들과 대결했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지 저들이 법의 뒤에 숨어서 빈말만 늘어놓았다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정의의 보안관」이라는 신화는 애초에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법관이 법의 장막 뒤에서 숨고 또는 온상의 화초 같아서는 존경과 위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강력한 법에 의해서 권위가 세워지고 법원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생각은 원시 형벌주의자들의 주장이자 학정(虐政)과 폭정(暴政)의 논리로써

비민주적이고 반인문학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법규에서 포괄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법관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있는데 이제는 사생활 범주까지 염려해 주는 것은 사법의 지나친 공손(恭遜)이자 자신들을 회화화(戱畵化)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존경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식과 정보가 그들의 머리와 경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육의 보급과 지식의 확장현상으로 인해

노인의 자리에 컴퓨터가 앉았고, 컴퓨터가 빅 브라더로써 모든 것을

지시하고 명령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법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이고, 컴퓨터의 판결화야말로 정보통신업이 이룩할 수 있는 놀라운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들쭉날쭉한 양형과 랜덤(random)식 선고로 사법정의가 불신을 받기보다는 범죄를 사안별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판례들을 유형화하고 정형화하여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미건조하고 엄밀해서 간극 없는 법리와 재빠르며 정확한 컴퓨터야말로 법 만능주의에 봉사하는 과히 환상적인 만남인 것이다.


나는 앞으로 법의 존재형식이나 법관의 신분적 위상이 지금과는 다를 것이며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의 흔적이 조금도 낄 수 없는컴퓨터가 완벽하게 판결하는 재판정의 전개양상을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사람들은 앞으로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신속하면서도 공평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사법부가 사법의 민주화와 사법의 인간화에 한발 다가갔으면 한다. 법의 엄정이란 사감(私感)이나 자의(恣意)가 개입되지 않아야 하고,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법언 아닌 법언이 법원을 향한 자성의 소리로도 들릴 수 있어야 하며,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의구심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고무줄 법적용의 의심을 불식 시키야 한다.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유혹, 녹도 슬지 않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군사정권 때라면 몰라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조자룡의 헌 칼로 변할 수 있으며, 상앙(商鞅)이 자기가 만든 혹독한 법으로 나중에 차열지형(車裂之刑)을 당하는 것처럼 법의 자살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은 앞으로도 계속 수난을 당하고 모독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제 더 이상은 권위주의로는 굴복할 사람이 없으며 법관의 권위도 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자명한 사실의 확인인 것이다.


2007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