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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感動)이 없는 시대

무릉사람 2019. 4. 13. 22:31

1.

오늘날의 사람들은 감격할 줄도 모르고 감동할 줄도 모른다고 한다. 이른바 3무시대( 무감동, 무감격, 무감흥)를 사는 것이다. 지난 가을, 어느 인터뷰에서 중견 배우인 주현님의 「내가 드라마에 출연 하지만, 요즈음 드라마는 감동이 없어서 아예 보지 않는다.」는 코멘트는 시사(示唆)하는 것이 많다.


가장 감동을 주어야 할 TV드라마조차 감동이 없으니 다른 부문은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전체에 감동이 없다는 것은 시대적 흐름의 변화가 재빨라 감동할 계제나 시간을 못 갖는다는 것이고.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경쟁이 치열해서 감동을 맛보고 감격에 겨워하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복잡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즉흥적이며 찰라적인 것을

좋아하며, 용이(容易)함을 따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리바이던(Leviathan)인 TV나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가 상업성과 선정성을 부추기고 꼬드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며, 질 높은 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나 한낱 생명체의 반복운동을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고상한 정신을 갖고. 고매한 인격을 지니며, 고아하고 사유방법을 익혀 고귀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문명이 더욱 빛나지 않고 반대로 인간성은 메마르고 정신을 황폐화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다. 인간과 정신이 결합해야 감동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동을 못 느끼는 것은 인간적인 것인 신화와 전설이나 동화를 내쫓았기 때문이고. 기획되고 연출된 감동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2.

감동의 부재는 인문학의 몰락과 관계가 있고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각축은 있으나 특출하고 걸출한 사람(奇人, 怪人)이 없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무사안일이나 복지부동이 시류이고, 도전정신과 실험정신, 모험심의 실종 때문이라고 본다.

옛날에는 흔했던 감동이 오늘날에는 왜 보기가 어려워졌는가? 그것은 사람들 마음이 고성(高城, 孤城)에 은거하며, 소라 같이 웅크려 마음을 닫고 가슴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감동의 화살을 쏘아도 튕겨나가고 아무리 감동의 전령사를 보내도 문전에서 되돌아오기 일쑤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반듯함을 지향하고 이름을 아꼈으며 정신이 번쩍였다. 전원(田園)이 그 마음을 감싸고 의기(義氣)가 생각을 보듬었다. 지금은 때로는 억지로 때로는 값싸게 아녀자의 눈물을 자아내고 아녀자의 인(仁)을 얘기하며, 호기심만을 자극하고 지엽적인 것으로 점철한다.


3. 

나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신기한 것, 교묘한 것.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치중하다

우리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봄직한 오징어 같은 인간이나 문어 같은 인간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혈서(血書)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공명의 출사표(出師表)나이밀의 진정표(陳情表)를 읽어줘도 마이동풍이다.

 

감동과 감격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조건은 아니어도 충분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삶이란 비단에 꽃을 수놓는 것이고, 꽃에 꿀벌이 찾아온 것과 같다. 감동은 인간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인간의 존귀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잠시 신선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고 잠깐 하늘나라를 엿보는 것이다.

 

감동과 감격은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사람만이 흠뻑 빠지거나 넘쳐난다. 세상을 단편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단지 선이고 색깔이고 모양이다 .감동은 ecstasy(황홀)이고 fantasia(환상)이자 magic(마법)이다. 그리고 통주저음(thorough bass)이다.

 

지금 사람들은 미학(美學)을 모르니 심미안(審美眼)이 있을리 없고, 탐미적耽美)는 오래전의 얘기일 것이다. 안다는 것이 겨우 관능미나 요염미이니 -비장미(悲壯美) 숭고미(崇高美) 장엄미 (莊嚴美) 절제미(節制美) 처염미(悽艶美)를 만나도 감동을 못 느낄 것이다.

그것은 형가가 진나라로 떠나기 전 비밀 유지를 위해 자기 목을 친 전광이고. 천리마가 소금수레를 끄는 것을 보고 자기의 웃옷을 벗어 등을 감싸준 백락(伯樂)이며, 자기를 죽이려했던 위징(魏徵)을높게 등용한 당태종인 것이다.


4.

감동은 핍진함에서 오고 리얼리티(reality)에서 생긴다. 로버트 카파(R Capa)가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찍은 「병사의 죽음」사진은 감동의 극치이며, 국립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미소는 천년이 흘렀어도 상금도 살포시 웃는듯하여 고혹적이다,

최순우 관장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바라보는 가을산의 애처로움과 사무침은 시적(詩的)이고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감동은 그리움이고 애탐이며, 미어지는 마음이고, 수용이며, 여과이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리 자진모리 가락을 들어도 별로, 계룡산 갑사의 단풍이나 설경을 봐도 별로. 겨울에 피는 매화꽃이나 동백꽃을 보고도 별로. 정선이나 봉평의 5일장을 거닐어도 별로일 것이다. 따라서 고조(高調)라는 피치(pitch)는 아예 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어디가나 심드렁하고 시큰둥하며 생뚱맞다. 풍류는 무엇이고. 풍광은 또 무엇인가.

장관(壯觀) 경관(景觀)에는 고개를 돌리거나 젓는다. 옛날 정이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다리느라 눈이 무릎까지 온 거나 혜가가 달마로부터 도를 얻기 위해 팔을 자른 것은 어찌된 것인가.


5.

감동은 평상에서의 일탈(逸脫)이나 파격에서 생기기도 하고, 초인적인 괴력이나 적나라한 인간적인 데서 생기기도 한다. 감동은 지극히 낮은 데로 흐르고. 지극히 낮은 곳에 머문다.  다시금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의 편파성에 항의하여 이를 거부한 감동이, 「보고 싶은 얼굴」의 가인 민혜경이 가수시상식에 의상상이 웬일이냐면서

거부한 감동을 맛보고 싶다.


2007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