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未完)의 용(用), 미숙(未熟)의 미(美)
그림을 감상할 때 서양화는 색상이 현란(眩爛)하고 화폭에 꽉 차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동양의 수묵화는 여백이 많아서 단조로움을 주고 덜 완성된 것 같지만 편안함을 주고 한가롭게 느껴진다. 이렇게 수묵화는 죄다 채색을 안했지만 완전한 그림이면서도 나중에 그림이나 글씨를 더 집어넣을 수 있는 미완(未完)의 그림인 것이다.
내가 머리말에 그림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완벽한 고증(考證)이나
완전한 복원(復元)을 말하고, 몇 백 년만의 완성이니 기량이 완숙하다니 하여 완전하게 보이는 것을 찬미하는데 반해 덜 이뤄지고 덜 되며 덜 익은 것은 아예 무시하는 폐해가 크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있는 것 치고 완전하고 극진한 것이 어디 있는가. 세월의 풍화작용에 깎이고 사람들의 역사적 판단도 바뀌는 마당에 그러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사람들의 자기위안이요. 보고 싶어 하는 현실에 대한 마음의 경도(傾倒)현상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꾸는 꿈이고 향상심이지, 그것은 애초부터 불능한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만 완전할 뿐이며 인간은 오직 모사나 시늉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고졸(古拙)이라는 말에서 보듯 차라리 그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미숙하며 부족하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들이 굴레 되어 인간을 속박 지으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를 향한 희원(希願)이나 상상력이 부정되고 배척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것들은 더 나아지려고 하는 발분(發憤)이고 성취동기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람이 터럭만큼의 결점도 없고 늙지 않으며 병들지도 않고 죽지 않는 순정인간(純正人間)이라면, 그것은 신과 같은 반열에 들거나 아니면 마네킹(mannequin)이나 인형들의 행진이나 집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종래의 통념인 천국이나 극락도 다시 인식을 해볼 필요가 있으니 밋밋하고 뻣뻣하며 따분하다면 권태로워서 살 수가 없다고 볼 것이요. 피도 눈물도 없다면 무정한 사회요 무심한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여러 전해 듣는 이야기를 통하거나 실제로 이따금씩 한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탈진한 듯 보이고 허탈해 하며 정체(停滯)하는 것을 접한다. 그가 지금까지는 목표가 있어서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이 견인차였으나 이제 정상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목표상실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죽자 살자 정력을 소모한 탈진증세가 겹치고, 정상에 올라봤자 대수롭지 않고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과 후배나 후학들에게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감이
그 사람을 괴롭히고 윽박지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인생이나 행적이 종착역에 가깝고 완료(完了)에 이르렀다는 표지이다.
그러나 정상이 아직 멀었고 허술한 사람은 현재 진행형이라 얼마든지 자기노선을
수정해서 갈 수 있고, 모자라고 불순한 것을 보충하고 보정할 수 있으니 기회는 더 열려있고 그간의 부덕(不德0이 덕이 되는 선순환에 올라탔다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재보고 달아보고 겨뤄보는 계량적(計量的) 형식을 빌리는데 이것도 역시 완성에 다가가고 완전해 지려는 인간의 욕구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생리상 완전을 추구하면서 반대로 완전을 시기하고 거부하는 경향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틀이 잡히고 무엇에고 정통한 만능인간(萬能人)이나 흠 하나 찾기 어려운 완전인간(完全人間)은 왠지 대하기가 어렵고 거북하지만 어수룩하고 모자란 사람은 마음을 놓을 수 있고 부담감이 없고 대하기가 편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이상으로의 완전은 좋으나 현실로서의 완전함이란 일반인에게는 우호적이지도 못하고 환영 받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것이 어느 날 충분하고 완전해 진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겠지만, 어쩌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세상의 파멸」「‘인류의 종말」일 것이다.
인생은 죽음으로써 완성되고, 세상은 종말을 맞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철학적 사색과 예언적 전망(豫言的 展望)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하여간 못나고 모자란 것이 사람들에게 어필(appeal)한다는 것은 너나 나나 별수 없다는 동류의식으로 인한 동정과 상호교감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이 완전해 지려하고 무결(無缺)해 지려하는 것은 한갓 희망사항이나 이것이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실현을 의도할 때 그 사람은 교만해지고 긴장감을 자아내게 된다. 이 결과는 생활주변에서 자주 목격되는 것으로 시험을 너무 잘 치르려고 하다가 시험을 아주 망치는 경우와 도박판에서 판돈을 전부 거머쥐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본전마저 잃는 경우일 것이다.
세상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인데도 더 이름이 있고 더 알아주는 것도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자. 화가 자신이 미완의 그림이라 했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은근하며 매력적이다.
또 백치미(白痴美)라는 것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름다움중의 아름다움이리고도 하는데, 여인이든 작품이든 촌스럽고 어수룩하지만 인공(人工)이나 꾸밈이 없어서
마음을 이끌게 하고 넋을 빼앗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해 지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인성을 뛰어넘자는 것이며 신의 영역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사람의 일이란 공백이나 여백이 있어야 기원이 있고 간구가 있는 것이며 아쉬움도 있고 기다림도 있는 것이다.
될수록 여운(餘韻)이 남아야 하고 될수록 여지(餘地)를 남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완과 미숙은 흠이 아니고 허물도 아니며, 숨 쉴 수 있는 공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여기에 미완(未完)의 용(用)과 미숙(未熟)의 미(美)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그래야 인간적인 것이고 그것들은 생활의 양념이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마찰인 것이다. 모두가 완전한 인간뿐이고 모두가 완전한 형태라고 거듭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지루하며 싫증나며 따분할 것인가를. 우리는 모두 완전인이 아니기 때문에 복제(複製) 될 수 없고, 똑같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사람 삶이 보충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의 운명은 훼손(毁損)되는 것만 남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