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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敦煌)은 거기에 있었다.

무릉사람 2019. 2. 19. 22:53

독일인 리히트호벤이 처음 언급한 실크로드 (silk road)도 가슴 설레는 이름이지만 그 중심지인 둔황(敦煌)이야말로 꿈의 이름이다. 고대 동양과 서양의 접점이었던 둔황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서유기가 어우러진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메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나라 때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들먹였을 옥문관(玉門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가욕관(嘉峪關), 손오공과 관련된 화염산(火焰山), 위치가 자주 바뀐다는 유령의 놉노르호수(湖水), 바다로 흘러들지 않고 사막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타림강은 우리의 목을 늘어뜨리고 동공을 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밟으면 저절로 소리를 낸다는 명사산(鳴沙山), 그 아래 오아시스인 월아천(月牙泉)은 조물주의 걸작이기 때문에 빼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얼마만큼의 교양이 있었고 얼마나 우아한 사람이었을까. 누린(樓蘭), 고창국(高昌國)! 불국기(佛國記)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전하고 ,호희(胡姬)와 비파로 전하고. 사비성과 똑같이 깨어진 기와장 몇 조각으로 지금은 전하는 이름들이다. 그중에 압권은 천불동(千佛洞)일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신과 대면하고 그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승려 법현(399-414)이 구법을 위해 거쳐 갔던 곳. 승려 현장(602-664)이 구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 승려 혜초(700-)가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는 곳, 그리고 마르코폴로가 지나간 곳. 그곳은 당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였다. 더욱이 그곳은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깊으니 신라의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그곳 막고굴에서 발견되었으며. 당나라 때 조성된 벽화에서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옛 한국인도 찾을 수 있다. 물론 고선지 장군도 그곳에서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다.

 

인간은 달을 정복함으로써 스스롤 격하하였다. 가장 큰 데미지는 동화와 전설의 상실이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상상의 나래를 접어야 했으며, 쌍태아인 꿈꾸는 수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에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상상력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둔황인 것이다. 둔황은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섬. 아마존의 여인과 더불어 인간의 상상력이 바삐 움직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만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를 시야에 가두기 때문이다.

 

둔황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19세기 초 탐험가 스타인이나 펠리오가 소개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 그곳이 서양인들에게는 비단길의 한 지점이고 저들의 박물관을 채워지는 공급기지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구법의 여정지. 서방정토의 시발지 신앙의 순례지라는 것. 사막 속에 위치했기 때문에 숱한 전란 약탈 파괴로부터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었고. 이 척박한 사막(광야)이라는 것이 예수나 마호멧에게서 보듯 정신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지금도 둔황을 생각하면 보슬비를 맞는 것 같지만, 당나라 시인 이동(李洞)의 시

「서천으로 가시는 삼장법사를 전별하며(送三藏歸西天)」라는 시를 대하면 또 하나의 애가 끊어짐을 느낀다.

 

십만리 여정 얼마나 어려울까? (十萬里程多少難)

사막에서 염불하며 고난을 이기시리. (沙中彈舌受降龍)

인도에 도착하면 머리는 희어지실텐데 (五天到日應頭白)

달 지는 장안에 한 밤의 종소리. (月落長安半夜鍾) (돈황이야기에서 발췌)


2009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