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공동선이 없다.
1.
오늘날 한국사회처럼 규범이 흐려지고, 가치관이 실종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나라당 아무 아무 의원의 공천헌금이나 현대 자동차 비자금 사건도 물질만능주의의 몇 갈래 표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신교(物神敎)가 우리의 뇌리를 사로잡고 그것에만 의지하고 의탁하기 때문이다.
‘개가 사람을 잡아먹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것은 옛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나 있었고, 16세기 영국에서나 있는 줄만 알았는데, 이 나라에는 상류층에서는 넘쳐서 탄성(歎聲)이 하류층에서는 없어서 비명(悲鳴)이다.
서로가 서로를 대적(對敵)하는 묵시록적 상황이 펼쳐지고, 서로가 서로를 경멸(輕蔑) 능멸(凌蔑) 모멸(侮蔑)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 붙이고 마음 줄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홉스(T Hobbes)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 돌입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늑대로 여기는”가설을 증명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 같다.
2.
남을 짓밟아야 내가 설 수 있고, 나와 의견을 달리하면 모두 적이며, 항시 옷섶은 물론 가슴 속까지 비수를 품고 살아야 한다. 종교도 철학도 무용하고, 양심도 믿지 못 하고, 믿을 것은 내가 가진 재산과 완강함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교양인이나 비교양인이나 지도층이나 3류 인생이나 눈은 경계감으로 번득이고 눈빛은 적의로 가득 찼다.
이러니 코드인사는 거북이등처럼 단단하고, 주변인들은 거미줄 치기에 바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태는 양식 있는 사람을 좌절 시키고, 의인을 분노 시키며, 뜻있는 사람을 슬프게 하고, 하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임에도 못된 것이 좋은 것을 더욱 구축(驅逐) 한다.
사실 원시시대에는 완력이 미덕이고 정의였다. 그야말로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 지배하에 각종 속임수가 난무하고, 계통은 무시되며, 오로지 상대방의 철저한 무력화(無力化)만이 나와 내 집단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였다.
3.
여기에서는 이성(理性)을 찾고 사리를 따지는 것은 미친 짓이며 사치였다. 호전적이고, 도발적이며, 적개심이 충만한 것이 능사이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사회가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겉모양은 법과 제도 등의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는 것 같으나 실은 몇 사람의 자의(恣意)에 의해 움직이며, 시세(時勢)에 따라 선악(善惡)이 바뀐다.
앞에서는 상생을 말하나 뒤로는 폭력을 부추기고, 경쟁자를 음해하며 편 가르기에 바쁘다. 보수와 진보의 소리는 높아도 지식의 나열이나 수사(rhetoric)이며 그나마 보수의 장점인 온정(溫情)도 진보의 장점인 공(公)우선의 원칙도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흉포(凶暴) 광포(狂暴)로 표현될 만큼 산다는 것이 살얼음 밟듯 하며 언제 어디에서 지뢰가 터져 이 나마의 안녕을 깨뜨릴지 아무도 모른다.
4.
오랫동안 못살다가 모처럼 돈이 생기고 권력을 잡게 되니까 눈이 멀어서 그럴 수가 있다. 충신 열녀들은 일찍 죽어 후손이 끊어졌으나, 간사한 사람들만 명맥을 이어 그 자손들이 우리라서 그럴 수가 있다. 심성들이 빈 수레 같아 과시하고 전시해야 직성이 풀려서 그럴 수가 있다.
내가 남을 속이고 등을 쳤기 때문에 남도 지레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맞을 수도 있다.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부와 명예를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하는 저어 생각에 그럴 수도 있다. 하여간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지금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중적 신분을 지니며 ‘남들도 다 그러니까’ ‘더러운 세상’ 등의 자위와 푸념을 하면서 모두가 어떤 때는 공동정범 또 어떤 때는 방조범과 교사범으로 사회의 침몰에 일조를 하고 있다.
5.
그런데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병폐들을 치료할 별 뾰족한 처방이 없다는 것이고, 있다 해도 하루아침에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며,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반목과 질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상과 하 어디를 둘러봐도 모다 봉(鳳)은 없고 닭들뿐이며 뱀장어는 없고 미꾸라지뿐이라는 것이며, 긴 시간동안 ‘새로운 정신’이나 ‘새로운 기풍’이니 하면서 우려먹고 사람들을 농락하여서 그 약발이 안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으니 이때에 필부의 용(勇)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럼 이 소모적이고 자멸(自滅)적인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는 풍조를 극복하고 동포를 발끝의 때만큼 여기지 않는 극단적 배타성을 순화하는 길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우리 사회 “공동선(共同善)”의 제시에 있다고 본다. 수립이나 확립이라도 좋고 지향이나 추구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이 공동선은 우리가 정파를 달리하고 교파를 달리하며 이해를 달리하고 입장이 바뀌어도 그 가치를 일정부분 공유하며 그 세계의 존재를 부분적으로나 인정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일체감을 주고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의 ‘귀족정신’이나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가 너무 진부하다면 ‘더불어 사는 사회’도 좋고, ‘우리 후손이 살 땅’도 좋으며, ‘국민이 배가 불러야 한다.’도 좋다. 또는 3공화국 때의 새마을 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도 좋고 1980년대의 CBS방송국의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이라도 좋다.
최대한 우리 모두 공감하며 향상심을 고취시키며 인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장려하며 보급하는 것이라면 되는 것이다.
6.
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 5000년 역사를 보거나 오늘날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탐욕심을 보고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며 절실한 것은 “관용의 정신”과 “겸손한 마음씨” 라고 보고 있다.
먼저 관용(寬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문에 楚宮失矢 楚人得之(초궁실시 초인득지)라는 말이 있다. 초나라
궁궐에서 잃어버린 화살은 초나라 땅에 있으며 초나라 누구군가 습득했을 것이니 좀스럽게 그 점유 여부만을 따지지 말라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대범함과 초연함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늘의 한국 지도층이나 상류층처럼 가르고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내가 가진 권력이나 부가 도망을 가도 한국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 연부역강한(年富力强)한 사람들이 계속 줄줄이 뒤를 받쳐 준다는 것, 이 생각만 했어도 구청장 공천에 돈을 받지 않고 정직한 인물을 찾았을 것이며, 내 혈육을 위해 비자금을 꽁꽁 숨기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구했을 것이다. 이 생각만 했어도 중국처럼 정적(政敵) 등소평(鄧小平)을 살려주어 훗날을 도모하게 하지 우리나라처럼 철저히 족속과 문하(門下)를 도륙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생각은 우리의 외연을 넓혀주니 하늘 아래 의견이 달라봐야 오십 보 백보라는 것. 너와 내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different)이 나를 강화시켜주고 나를 빛내주며 내 존재를 드러내 주며 나를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의존관계요
잘못한 상대방은 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알아도 한층 부드럽고 그 상대방은 나의 비익조(比翼鳥)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는 이해만 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획일적이고 일사불란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와 의견을 달리 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의 화통함이 아쉽고, 모든 물을 받아들이면서 나눠주는 호수(湖水)와 같은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 또한 옛날 이스라엘의 시인(詩人)이 고백한 말로
“우리의 연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륜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에서 우리는 모든 살아있는 것과 강성한 것들의 덧없음을 알아야 하고 이에서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시를 조금이라도 알고 역사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의 무게로 인하여 몇 날을 숙연할 것이며 몇 날밤이 허허로울 것이다. 이 말에서 심장이 찔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절대로 뇌물이나 부정한 돈을 받지 않을 것이고, 분식회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직과 긍휼과 섬김으로 살아도 모자라는데 그 외에는 눈길 주는 것도 아까운 법이다.
7.
이렇게 관용과 겸손이 ‘우리의 선’이 되어 약속이 되고 여러 세월동안 굳건하게 지키며 차곡차곡 쌓이어 우리의 전통이 되게 하고 풍속이 되게 하고 문화가 되게 해야 한다. 먼저 우리의 아이들에게 교육과 훈련으로 체득시키면 개인위생이나 사적인 일을 잘하는 에너지를 단체나 집단의 공동생활이라 하여 못 할리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선이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이 저변에 확산되고 생활에 반복될 때 사회는 온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칠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인류를 아름답게’가 어느 화장품 전용광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임을 알고 생명이 존중 받는다면 우리나라 사람만이 느낄 수 있고 알아듣는 말인 “신들린 사람들” “신명나는 사회”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2008년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