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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설」은 살아있다

무릉사람 2019. 4. 15. 17:00

죽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산 사마중달(司馬仲達)을 물리친 것처럼 역사에서 때로는 기묘하게도 효용이나 역할이 끝난 이론들이 힘을 얻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즈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파트값 폭등을 비롯한 뭇 현상들로 인한 계급투쟁설의 부상이다.


함석헌(咸錫憲)은 아무리 세계의 우수한 문화나 문물이 한국에 들어와도 지배계층의 천박함과 조잡함으로 이내 하수구(下水溝)화한다고 갈파하였다. 조선시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에서는 실질보다는 형식을, 민생보다는 정쟁 위정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특히 이 나라에서의 기득권은 영국의 상류층이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로 명명되는 가진 자의 미덕이나 책무는 눈곱만큼도 없고, 오늘날 전 세계계인이 지탄하는 미국의 도덕적 근본주의도 남의 이야기이다.

있다면 자기나 자기 가족들의 만세영화(萬歲榮華)를 위해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모략과 포식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가진 자들은 온갖 불법과 비리로 돈을 모으고도 그것이 서민들의 한숨과 눈물인줄 모른 채 새천년의 영주(領主)나 토호(土豪)가 되어 중앙에서 지방에서 세상이 좁다고 활개 친다.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듯, 가진 자들의 아량이나 시혜는 이 나라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 나라의 가진 자들은 예외적인 경우는 있겠지만 다들 돈에 사로잡힌 야차(夜叉)요 아귀(餓鬼)들이다.

그러니 물이 아래로 흐르듯 모든 사람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혈안이 돼서 한탕과 대박에 온 나라가 잠을 못 이룬다.

이 나라의 보수나 진보라는 것도 다 지역을 바탕으로 한  편 가르기요 패거리이니, 그동안 염불 보다 잿밥이 더 승한 이유이다.


이 나라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나 박애주의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고.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대항하고 만인이 만인에 대적하는 이리들과 좀팽이들만의 천국이다. 이 나라의 가진 자들은 속담의 99 섬을 가진 부자가 1섬 가진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는 그것이고, 자기들은 상전이고 국민을 종 보듯 선택받은 행세한다.


최근에는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그 주범(主犯)은 중국이다. 중국과의 교역으로 대기업은 엄청난 돈을 벌고 있지만 저들의 저임금과 물량공세로 빈농과 도시의 막일꾼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중국으로 인해 「먹는 것의 양극화」 「입는 것의 양극화「자는 것의 양극화」를 사무치게 목도하고 있다.


독선적이고 공명심에 불타고 치기(稚氣)어린 사람들로 인해 반드시 필요하고 추구해야 할 것들이 포퓰리즘(populism)이란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적대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균점이나 기회의 평등이나 소득의 재분배 등이 엄연한 헌법적 사항이고 경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제기되는 것임에도 그 용어들이 좌파라 하고 레드(red)라 지목되어 그 중요성이나 가치가 간과되고 무시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소득은 불평등해야하고 교육도 불평등해야하고 기회도 불평등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오도되고, 이는 마치 자본주의와는 대척관계로 오인되고 있다. 역사는 발전하고 인류의 정신은 고양되는데도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것은 환영 하고 어느 것은 배척 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기득권자들의 행태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암울하게 하고, 다중(多衆)의 위력(공무원이나 대기업노조)을 갖지 못한 대다수를 침묵케 하고 좌절하게 하는 나라에서는 칼 맑스(K Marx)나 엥겔스(F Engels)가 무덤에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한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사람의 피가 흐르는 사회주의」가 풍미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람의 피가 흐르는 자본주의」를 그려볼 때이다.


2006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