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의 절정에서 몰락의 날을 생각한다.
한때 서지중해(西地中海)를 석권하고 로마(ROME)를 존망의 기로에까지 몰고 간 카르타고( CARTHAGO). 그 굳센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小 Scipio)는 불타는 카르타고 도시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강성한 로마도 언젠가는 저렇게 쇠퇴할 것이란 「권세의 절정(絶頂)에서 몰락(沒落)의 날을 생각하는」선견을 보였었다.
지략이 뛰어나고 용병에 능한 스키피오지만 환호와 축배 대신에 무한한 비감(悲感)에 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인류
흥망성쇠의 무대인 역사에서 성자필쇠(盛者必衰의 법칙」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세상에는 우리가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모든 살아있는 것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생(生) 성(成) 소(消) 멸(滅)의 운동법칙이 그것이다.
무릇 생명 있는 것은 그 생명으로 인하여 일정한 활동을 하다가 끝내는 정지(停止)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오늘의 성취에 들뜨고 꿈꾸듯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낯설면서도 차마 인정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치(一治)하면 일란(一亂)하고 일기(一起)이면 일복(一伏)하며, 일희(一喜)있으며 일비(一悲)한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경험했고 오늘날에도 수시로 되풀이 되는 공리임에도 사람들은 순간적인 것에 흔들리고 사소한 것에 얽매인다.
천 년 만년 한 없이 살 것 같은 착각에 물욕을 제어 못하고 이웃과 쟁투하였다. 나의 오늘 이 부(富)가, 나의 오늘 이 신분이 언젠가는 다하고, 언젠가는 없어지고 나란 형상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돌아감을 안다면, 그렇게 기를 써서 돈을 벌고 불의로 권력을 잡으며 남을 음해하는 혀를 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공평하면서도 평범한 사실에서 자연 앞에 겸손하고 사람 앞에 겸허할 수 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복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부나비처럼 달려드니 「즐거움이 지나치면 슬픔이 온다.」 는 말은 무시한 채 탐욕하고 겁박하고 강권(强權)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건만, 당대뿐만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후손을 위해 거만금을 모으고, 왕릉 같은 묘를 꾸미고, 몸치장 집 단장에 바쁘다. 여름날 들불에 뛰어드는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알지 내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묶으면 헤쳐지고, 모으면 흩어지고 합하면 나뉘는 것이 세상이치이나 독선과 아집에 사로 잡혀 화가 몸에 닥쳐야 땅을 치며 후회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고 산봉우리가 높으면 계곡은 깊다. 꽃이 피면 지고 달도 차면 기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따른다. 절정의 시간은 극히 짧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역사에서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음에도 미련한 인생은 꼭 끝을 보아야 멈춘다.
일전불사(一戰不辭)가 찻잔속의 태풍이고 단호함과 엄정이 삼척동자들의 항설(巷說)임에야...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次)을 사랑한다. 만월(滿月)보다는 음력 열나흘의 달을 곱게 보고 꽃도 활짝 핀 꽃보다는 막 피어날려는 것을 좋아한다. 즐거움이 다하기 전에 멈추고 욕심이 채워지기 전에 돌아선다. 곧 만족 최고 득세(得勢)는 쇠락의 징조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한나라에 스키피오 같은 인물이 몇 명만 있어도 지금처럼 정치판이 살벌하지 않고 사회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 사람 한 정권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있을 수도 있다.
누가 스키피오처럼 물극즉반(物極則反)을 알아 국가경영을 사려 깊게 하고, 누가 남송(南宋)충신 문천상(文天祥)처럼 미인진토하대무?(美人塵土何代無?미인도 진흙으로 돌아가는데 하물며 분칠한 우리들이야)의 심정으로 부드러운 눈빛의 정치를 하는가?
-낮게, 낮게 아주 낮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2005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