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빈약한 시대
최근 만들어진 영화들에 심드렁하고, 좋다는 노래를 들어도 시큰둥하다. 영화, 음악, 소설 어느 것 하나 어렸을 적 밤을 새워 읽던 「아더왕 이야기」나「철가면」 같은 감동은 없었다. 다만 근자에 읽은 다이오 호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만이 소설 읽는 재미를 선사했을 뿐이다.
그만치 내가 나이를 먹어 둔감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인류라는 요즘 신세대들의 취향을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마음에서 궁기(窮氣)가 비치고 속내를 꺼리지 않고 쉽게 드러내는 현상을 보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면 나의 탓이 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회 탓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금속이 서로 부딪혀 쨍쨍 소리를 내듯 신경들만 날카로울 뿐 사람 사이에 감격이나 감흥이 없는 시대이다. 사실 지금 사람들은 정신의 위대함도 모르고 생각은 얕고 기교에만 치우쳐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정화 시키는 가치들에는 생뚱하다. 명작이나 명화, 명곡과 명품들을 대할 기회도 없거니와 설사 있었다하더라도 그것들을 만들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지금사람들은 비비안 리(Vivian Leigh) )가 스칼렛역으로 나오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대사로 유명한 1939년에 만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도, 챨스 헤스톤Charlton Heston)이 유다 벤허역으로 나와 메살라와의 박진감 있는 전차 경주 장면을 보여주는 1959년 작 「벤허Benhur」도, 오마르 샤리프(Omar Sharif)가 유리 지바고역으로 나와 우랄산맥의 끝없는 대설원과 러시아적 우수를 보여주는 1965년도 작품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를 미안한 소리지만 만들 수가 없다.
전설적 록 뮤지션(rock musician))인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Garfunkel)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비틀즈(The Beatles)의 「예스터데이yesterday」나 아바(ABBA)의 「워털루waterloo」나피터 울프(Peter Wolf)의 「우울한 일요일Gloomy Sunday」은 앞으로 그 노래 소리 듣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드보르작(Dvorak)의 「신세계From the new world교향곡」이나 요한 슈트라우스(J Y Strauss)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같은 왈츠 곡은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고 우리나라 고려 상감청자의 아름다운 색깔과 정교한 문양과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넉넉한 미소 앞에서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탈리아의 원형극장의 웅장함이나 장엄함에서 후세사람들은 위축 되고 왜소함을 느낄 것이다.
종교나 학문분야는 또 어떠한가? 노자(老子)는 B.C 6세기 경 석가모니는 B,C 6_4세기 경 공자(孔子)는 B,C551_479년에 활동했다. 빛은 그때에만 있었고 진리는 그 사람들만의 독점물은 아닐 터인데도 아직도 그 사람들의 말씀이 최고의 가르침으로 남아있고 몇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이 사람들에 버금가는 출중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학문도 선인들의 펴낸 것을 재해석하는 수준으로서 오늘날 유명하다는 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강해(講解)이다 집주(集註)이다 해서 선인들의 학문적 성과를 계속 우려먹고 짜먹고 베껴먹는 형편이다. 이치로 따지자면 응당 그간의 지식의 축적과 기술의 발달로 앞의 사람들을 능가하는 이론들이 나올만하고 더구나 오늘날 세를 얻고 있는 현상학파나 분석학파 계량학파의 혁혁한 학문적 철저함을 봐서는 당연한 것이다.
앞으로는 슬프게도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소리들 듣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악성(樂聖)은 물론이고 시선(詩仙)이나 시성(詩聖)이라는 말도 문호(文豪)나 화타(華陀)나 편작(扁鵲)같은 말도 사라질 것이다. 반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은 계속 유효적절하고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도 계속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것이다. 명색이 패스파인더호가 화성을 탐사하고 보이저호가 목성 토성을 탐험하는 시대에서 말이다.
왜 아주 오랜 옛날에는 된 것이 오늘에는 아니 되고 의식수준이나 기술수준이 옛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옛사람들을 앞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현상을 몇 가지 짚어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선 환경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옛날에는 생활이 단순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많은 것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할애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한 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었고, 정력과 신경을 오로지 생각하는 데에 집중 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양에서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의 기적이 일어났고 서양에서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이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주역(周易)에 궁칙통(窮則通)이란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막다른 골목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노력하면 궁극에 이르고 사통팔달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른바 득도(得道)도 했던 것이다. 벌써 옛날사람들은 오늘의 시대적 화두인 선택과 집중을 이미 실천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것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물질 중심적 사고를 하고 기계적이 되고 편의성을 도모한다는데 있다고 본다. 장문의 글을 안 읽고,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승부가 갈리는 게임 같은 것을 즐기고, 드라마도 여성 취향적인 것에 쏠리는 등 철두철미 오락성에 치중하지 예술성이나 종교성과는 담을 쌓기 때문일 것이다. 상업주의가 창궐한 대신 창의성이나 모험정신은 없다보니 인간을 통찰하는 대작이나 걸작은 태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서양의 동태적 역사관에 따르면 인류는 계속 진보하고 발전하고 전무후무한(前無後無) 일을 이룩하고 공전(空前)의 대성공을 하며 파천황(破天荒)적인 일들이 잇따라야 하는데 산업이나 기술은 대충 인간의 의욕에 봉사하나 정신은 쇠퇴하고 마음은 혼미한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동양의 순환론적 역사관에서 흝어 봐야 하는데 지금은 오행상의 화(火)의 시대라 다들 성질이 불같고, 대량 유통이 이루어지고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화의 시대라 가볍고 빠른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예의바름과 기품 있음은 다음에 오는 수(水)의 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도 청종할 만하다.
네 번째로는 장인정신의 유무와 종교적 사명감의 인식 여부이다. 옛날에는 조각을 해도 나의 분신처럼 했고, 글씨를 써도 나의 품성처럼 썼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을 축조했고 부처님의 이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되었다. 그러니 뭘 해도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었고 소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금전을 먼저 생각하다보니 처음의 뜻이 왜곡되고 바래지고 작아지는 것이다. 시류에 대한 영합과 야합이 불후(不朽)나 불멸(不滅)의 작품탄생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원초적 경향 탓일 수도 있고 시간의 가치가 점점 소멸되어감에 따른 인간 한계적 사고의 발로일 수 있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 예에 따라 뛰어난 인물 뛰어난 작품을 동시대사람들은 몰라보고 감히 「네까짓 것이」 라는 폄하의식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독서의 부족과 사고력 저하도 그 원인들이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여태까지 본 것들은 구전(口傳)으로 남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도 과거의 잿빛 기억으로 멀어지고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것은 쉬 채울 수가 있지만 마음의 가벼움은 쉬 채워지지 않는다. 쇠의 녹은 얼른 닦아낼 수 있지만 마음의 녹은 그렇게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들이 사마귀가 앞다리를 치켜들고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것 같다하더라도 나는 이 시대의 정신의 빈약함, 정신의 곤궁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이 이끌어주지 못하고 지탱해 주지 못하는 물질의 번영은 묘목을 웃자라게 할 요량으로 들어 올리는 것처럼 부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리 이전 것들이 아름답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들은 극복되고, 경신되며, 능가당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는 더 푸르다는 것을 아는 우리. 일찍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야말로 우리가 추구하고 쟁취할 대상인 것이다.
2005년 11월 3일